윤동주의 시를 품었던 광양, 예술이 흐르고 자연이 빛난다
윤동주 시인의 유고를 품었던 ‘정병욱 가옥’
별 헤는 다리와 해맞이 다리로 연결된 ‘배알도’
순천·여수·하동·남해 한눈에 보는 ‘구봉산 전망대’
폐창고가 복합문화공간으로 변신 ‘광양예술창고’
‘광양’을 오해하고 있었다. ‘제철소가 있는 산업도시, 가볼 만한 곳은 매화마을뿐’이라고 생각했다. 막상 광양에 발을 들이니 뜻밖의 매력과 이야기가 가득했다. 광양의 품에 윤동주의 시가 있었고 일상 속에서 예술이 흐르고 푸른 자연이 빛났다.
■이곳이 없었다면 윤동주 시집은 없었다
남도의 끝자락 광양에서 예상치 않게 시인 윤동주의 흔적을 맞닥뜨렸다. 섬진강물과 남해바다가 만나는 망덕포구에 빨간 양철 지붕의 오래된 집 한 채가 서 있었다. 국문학자 고 정병욱의 옛집으로, 윤동주의 시를 품고 지켜낸 집이다. 광양과 윤동주는 어떤 인연이 있었던 걸까.
정병욱은 윤동주의 연희전문대 후배이면서 하숙 생활을 같이하는 등 절친한 지기였다. 1941년 윤동주는 졸업을 앞두고 시집을 내려 했지만 일제 탄압의 빌미가 될 수 있다는 권고에 출간을 포기했다. 윤동주는 시집 3부를 직접 필사해 한 부는 자신이 갖고 한 부는 스승 이양하 교수에게, 한 부는 정병욱에게 건넸다. 이후 윤동주는 일본 유학을 떠났고 1945년 후쿠오카 감옥에서 생을 마감한다. 정병욱은 1944년 학도병으로 끌려가기 전 광양 집으로 내려와 어머니에게 윤동주의 원고를 맡겼다.
어머니는 양조장의 마룻장을 뜯고 항아리 속에 원고를 넣어 보관했다. 마루는 늘 어머니가 앉아 있는 곳이라 안전하게 여겼다. 정병욱은 무사히 귀환했고, 윤동주 서거 3년 후인 1948년 시집을 출간했다. 그 시집이 윤동주의 첫 시집이자 유고 시집인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이다. 윤동주와 스승이 간직했던 원고는 사라졌으니 이곳이 없었다면 윤동주 시집은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가옥 옆 안내소에서 상주하며 해설을 해 주는 문화관광해설사는 이렇게 마무리했다. “인간 윤동주는 북간도에서 태어났지만 시인 윤동주는 광양에서 태어났다.”
1925년에 지어진 ‘윤동주 유고 보존 가옥’은 지난해 완전 해체해 복원했고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돼 있다. 가옥으로 들어서면 마루 밑 항아리를 볼 수 있다. 그 곁에는 시집 복사본이 전시돼 있다. 다섯 살 어린 동생이었지만 ‘정병욱 형’이라 칭한 글에서 윤동주의 성품이 느껴진다.
가옥의 규모는 작고 크게 볼거리는 없지만 그곳이 품은 스토리는 마음을 크게 울린다. 잔잔히 물결치는 바다를 바라보며 우정과 모정과 인연에 대해 생각해 본다.
■낭만과 힐링의 공간, 배알도와 구봉산 전망대
섬진강과 바다가 만나는 곳에 작고 푸른 섬 하나가 동그마니 떠 있다. ‘배알도’이다. 망덕산을 향해 엎드려 절하는 모양이라, 절 배(拜), 아뢸 알(謁)을 썼다고 한다. 조선시대 귀양 온 이들이 한양을 향해 절을 올렸다고 해서 이름 붙여졌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망덕포구에서는 이름도 예쁜 ‘별 헤는 다리’로, 배알도 수변공원에서는 ‘해맞이 다리’를 통해 섬으로 들어갈 수 있다. 배알도 수변공원에 주차를 하고 배알도로 향했다. 여기저기 화려함을 다투는 풍경이 아니라 시야에는 여백이 가득하다. 바다 위를 천천히 걸어 섬에 닿는 시간은 힐링 그 자체다. 섬 정원에 닿으면 낭만도 가득하다. 작약, 수국 등 아름다운 꽃이 계절 따라 피어난다. ‘배알도’라는 빨간 조형물과 광양의 꽃 조형물은 포토존이 되어 준다. 섬 정상으로 향하는 나무 덱을 따라 오르면 소나무에 둘러싸인 정자 ‘해운정’이 나온다. 바다와 하늘, 바람을 느긋하게 즐길 수 있다.
‘구봉산’이라고 하면 대부분 아홉 봉우리를 떠올린다. 하지만 광양의 구봉산은 그 뜻이 아니다. 옛 봉화산이란 뜻이다. 해발 473m로 그리 높은 산은 아니다. 구봉산 전망대 바로 아래까지 차로 올라갈 수 있다. 5분여 덱 계단을 오르는 수고를 더하면 어마어마한 경치가 펼쳐진다. 광양제철소와 광양항은 물론 백운산, 이순신대교, 노량대교, 하동화력발전소, 지리산 천왕봉, 순천 여자만, 여수 국가산단까지 탁 트인 풍경을 360도 파노라마로 조망할 수 있다.
광양의 상징인 매화를 형상화한 메탈아트 봉수대도 눈길을 잡는다. 밤이면 더욱 환상적인 야경을 뽐낸다. 저 멀리 하늘과 바다 사이로 이순신대교가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보인다. 광양과 여수를 잇는 2260m 길이의 현수교이다. 주탑 간 거리인 1545m는 이순신 장군 탄생 연도를 기념한 것이다. 푸른 풍경을 내려다보니 도심 고층 건물에 눌려 있던 마음이 시원하게 풀어진다.
■폐창고에 가득 채운 예술 감성, 광양예술창고
1970년대 무연탄이나 밀가루 따위가 쌓여 있던 창고가 ‘예술창고’로 옷을 갈아입었다. ‘광양예술창고’는 도시재생사업의 결과물이다. 경전선 복선화로 광양역이 옮겨가면서 그 부지에 전남도립미술관이 들어섰고 창고로 쓰이던 곳은 ‘예술’이 채워졌다. 놀거리와 볼거리가 많아 광양 핫플레이스로 뜨고 있다. 원래 하나였던 기다란 창고를 미디어A동과 소교동(소통·교류·동행)B동으로 나누었다. 건물 내부 천장을 마감하지 않고 목재 트러스 구조를 그대로 드러냈다.
먼저 A동으로 들어섰다. 광양 출생 대한민국 대표 보도 사진작가 고 이경모의 아카이브가 한쪽 벽면을 채우고 있다. 호남신문 사진부장을 지냈던 이경모는 1948년 여순사건 현장을 찍었고, 6·25 종군기자로 활약하기도 했다. 그가 시대상을 기록한 사진 600장을 대형 터치스크린에 담았다. 작은 사진을 터치하면 확대한 사진을 볼 수 있다. 작가가 생전 수집했던 카메라도 함께 전시하고 있다.
전시실 한쪽에서는 문해교육 졸업생 시화전 ‘문해, 글꽃으로 피어나다’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감동과 웃음과 인생이 담겨 있다. ‘오늘 아침 텔레비 인간극장에/ 할머니 중학생이 나왔다/ 멋진 모습이 부러웠다/ 코로나 때문에 학교도 못간 나는/ 선생님이 보내주신 숙제장에/ABCD를 썼다./ 공부를 하니 텔래비에/ KBS MBC 영어가 보였다/ 히히, /내가 미국 온 기분이다.’(박순임 '인간극장')
미디어 영상실에서는 ‘아름다운 이름 광양’, ‘아이들 눈으로 본 광양’을 주제로 미디어아트를 감상할 수 있다. 유당공원의 이팝나무, 광양 매화마을,섬진강 망덕포구 등 광양의 자연을 담은 사진작품을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했다. 광양 어린이들의 작품을 전이수 동화작가의 작품과 함께 표현한 영상에서는 동심이 반짝인다.
“이 공간은 아이들을 존중하는 키즈존입니다. 이곳에 오셔서 마음 편히 쉬어 가시고 카페도 전이수 작가의 그림도 음악도 즐기고 가시기 바랍니다.” 소교동B동에는 문화쉼터, 다목적실, 어린이 다락방, 카페가 있다. 전이수 동화작가의 미술작품이 곳곳에 전시돼 있다. 대형 책장과 기차 모형 테이블이 설치돼 있어 아이들이 좋아할 공간이다. 문화예술 체험프로그램을 운영하고 토요일에는 버스킹 공연도 열린다. 전남도립미술관 앞 푸른 잔디에 내려앉은 빨간 새(자비에 에비앙의 작품 ‘Bird n2’)를 바라보며 광양의 예술을 마음속에 채워 본다.
광양 여행팁
전남 광양시 진월면 망덕길 249 ‘윤동주 유고 보존 정병욱 가옥’에는 문화해설사가 상주하며 설명해 준다. 해설 시간은 오전 10시~오후 5시(낮 12시~1시 점심시간)이다. 입장료는 없다.
광양시 용장길 369-155 ‘구봉산 전망대’에도 문화관광해설사가 있다. 설·추석 연휴 외에는 매일 해설을 운영한다. 해설 시간은 오전 10시 30분, 11시 30분, 오후 2시, 3시, 4시이다.
광양시 광양읍 순광로 660 ‘광양예술창고’ 운영 시간은 오전 10시~오후 6시(동절기 오후 5시)이며 매주 월요일 휴관한다. 입장료는 무료. 교육 일정 등으로 문화해설사가 없는 날도 있으니, 꼭 해설을 듣고 싶다면 미리 전화로 확인하는 게 좋다. 광양시 관광안내소 전화 061-797-3333.
김동주 기자 nicedj@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