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는 우리에게 언제나 ‘책무’를 주었다

최학림 선임기자 theo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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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의 한국사/한국사연구회

1987년 7월 9일 이한열 열사 장례식 도중 서울시청 앞에서 노제를 치르는 광경이다. 이날 문익환 목사는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쓰러진 열사들의 이름을 불러냈다. 돌베개 제공 1987년 7월 9일 이한열 열사 장례식 도중 서울시청 앞에서 노제를 치르는 광경이다. 이날 문익환 목사는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쓰러진 열사들의 이름을 불러냈다. 돌베개 제공

〈시민의 한국사〉(전 2권)는 선사시대부터 현대의 촛불집회와 문재인 정부, 방탄소년단(BTS)까지를 다루면서 ‘대한민국 시민을 위한 한국 통사’를 표방했다. 역사 연구자 70여 명이 공동으로 썼다. 교수와 박사급 연구자 50여 명이 집필했고, 교열위원 20여 명이 글을 다듬고 보완했다.

한국역사연구회가 기획부터 출간까지 10년 가까이를 쏟아부은 역작이라고 한다. 1988년 3개 학술단체가 모여 창립한 한국역사연구회는 학술저널 〈역사와 현실〉을 연 4회 발간하고, ‘웹진 역사랑(歷史廊)’을 매달 홈페이지에 올리고 있다. 이 책을 기획한 계기는 2013년 ‘교학사 교과서 파동’과 2015년 ‘국정교과서 파동’이다. 당시 전문 연구자들에 의한 ‘객관성을 담보한 역사 개설서’가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만들어졌다. 한국사 전체의 기본 사실을 담으면서 해석보다는 사실 설명에 비중을 두고 일반 시민이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 필요하다는 인식이었다.


시민 위한 한국 통사… 2권 8편으로 구성

‘객관성 담보 역사 개설서 필요’에서 출발

‘만주를 무대로 전개’ 한국 고대사의 특징

늘 ‘과제’ 부여받은 ‘시민의 한국사’ 그려


책은 2권 8편 체제다. 1권 전근대편은 선사 고대 통일신라·발해 고려 조선, 5편으로 구성돼 있고, 2권 근현대편은 개항기 식민지기 현대, 3편으로 이뤄져 있다. 남북국시대로 말하기도 하는 것을 책은 ‘통일신라·발해’로 단출하게 말한다. 각 시대에 대해서는 그 어떤 수식도 없다. 책의 8편에서 무엇을 읽어낼 것인가는 오롯이 독자의 몫이다.

역사에 관심이 있다면 더운 여름철 휴가 기간에 도전해볼 만하다. 고산준령을 넘나드는 웅장한 상쾌함, 깊은 숲속에서 흘러나오는 청풍을 느낄 수 있을 거다. 우리 고난의 역사, 빛나는 역사, 오욕칠정의 역사를 우리가 아니라면 누가 읽을 것인가라는 거다. 역사가 끊임없이 새롭게 다시 써지는 것이라면 역사는 끊임없이 다시 읽어야 하는 것이기도 할 테다.

책에 따르면 선사 이후 고조선에서 삼국시대에 이르는 한국 고대사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그 역사가 한반도뿐만 아니라 유라시아 대륙에 맞닿은 만주를 무대로 전개됐다는 점이다. 그래서 국제적인 문화를 꽃피웠다는 거다. 통일신라는 무열왕계 직계가 왕위를 계승한 1세기 남짓 정치 경제의 번영을 구가하면서 석굴암과 불국사로 대표되는 수준 높은 문화예술을 탄생시켰다. 고려는 11세기 초 거란의 침입을 막은 뒤 1세기 정도 번영했다. 유교 불교 풍수지리가 공존했고, 외래문화에 개방적이었으며 고유문화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자기 정체성을 지켰다. 조선은 16세기 이후 사림이 정계를 장악했으며 두 차례의 큰 전쟁을 치렀다. 후기로 접어들면서 양반 내부의 대립으로 관료제는 점차 서울과 노론 중심으로 축소 운영됐다. 조선의 지배질서가 탄력을 잃어가면서 새로운 사회변화 흐름이 곳곳에서 싹텄다. 그 변화의 흐름은 그냥 묻히는 게 아니다. 동학농민전쟁은 진압됐지만 그 경험 속에서 민중은 근대적 개혁, 의병운동, 그리고 민족해방운동의 주체로 성장할 수 있었다는 거다. 책에서는 이야기의 강물이 흐르고 있다. 예를 들면 고려 무신집권기에 하층민의 항쟁이 격화하면서 삼국부흥운동이 일어났다는 것과, 개화기에 입헌군주제를 지향한 독립협회의 시도가 전제군주제를 지향한 고종과 충돌하며 좌절했던 내막 등등에 이르기까지 책의 대부분은 ‘역사는 이야기구나’라며 읽히기도 한다.

150여 쪽을 할애한 식민지기를 책은 한국 근대사의 역동적이고 복합적인 전개 과정을 보여준 시기로 조명한다. 역사상 주권을 완전히 상실한 식민지로의 전환은 시련의 역사였으나 그 시련에 굴하지 않고 활발한 민족운동을 펼쳤다는 거다. 그 활발한 민족운동은, 우리가 근대를 만들었던 방식 중의 하나였다. ‘일대 사건’인 거족적인 3·1 운동이 일어났다. 전근대의 많은 지류들이 이 호수로 흘러들어갔으며, 다시 이 거대한 호수에서 우리의 현대사가 뻗어나오고 흘러나왔다. 동학, 3·1 운동, 그리고 4·19까지 그것들은 어쩌면 불연속적인 점처럼 보였다. 1979년 부마항쟁, 1980년 광주에서 다시 시작한 민주화 열기가 1987년 민주화의 열매를 맺었을 때, 아니 그때도 몰랐으나, 이제는 그 모든 것들이 면면히 이어져오고 있었다는 한국사적 통찰과 성취에 이르게 된 거다. 그것이 시민의 한국사일 테다.

한국사회의 민주화는 문화적 고양에 이르고 있다. 한류, K-문화가 세계를 활보하고 있다. 고대사가 드넓은 만주를 무대로 삼았듯이 K-문화가 그보다 더 넓은 무대로 퍼져나가고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지속가능한 성장을 향한 경제적 과제, 분단된 조국의 통일 문제가 놓여있다. 한국사는 책무를 우리에게 부여하지 않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한국역사연구회 지음/돌베개/1권 588쪽, 2권 574쪽/각권 3만 8000원.



최학림 선임기자 theo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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