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맨홀 뚜껑… 도시 역사 숨 쉬는 안전장치
오랜 세월 도시 발전 과정 지켜본 문화자산
다양한 용도·문양 가진 역사 기록·보존해야
훼손과 사고 방지 위해 철저한 관리는 필수
우리나라 인구의 91.8%가 국토 면적의 16.7%에 불과한 도시에 거주하고 있다. 이 같은 사실은 지난달 27일 국토교통부와 한국국토정보공사가 발표한 ‘2021년 도시계획 현황 통계’에서 드러났다. 그렇다면, 국내 모든 도시를 대표할 수 있는 상징물로는 어떤 게 있을까? 사람마다 생각하는 바가 조금씩 다르겠지만, 많은 이들이 공통적으로 고층 빌딩과 아파트를 먼저 꼽지 싶다.
맨홀(Manhole)도 대표적인 도시 시설물 가운데 하나다. 제대로 된 번듯한 도시라면 모든 시가지에 걸쳐 상·하수도관과 도시가스관, 전기·통신선 등이 복잡하게 매설돼 있을 것이 분명하다. 이는 수많은 사람이 한데 몰려 살고 있는 도시의 원활한 유지와 편리한 시민 생활을 위해 필수적인 지하 인프라다. 이같이 땅속에 묻힌 숱한 기반 시설의 검사·수리·청소 등 효과적인 운용을 위해 사람이 드나들 수 있게 만든 구멍이 바로 맨홀이다. 맨홀은 도시민들의 삶을 지탱해 주는 각종 시설과 설비가 실핏줄처럼 촘촘하게 뻗어 있는 지하 세계와 연결된 통로인 것이다.
지난달 23일 밤부터 장마가 시작된 부산에서는 비가 내리거나 흐린 날이 잦다. 길을 가다가 쏟아지는 비를 만날 때마다 자연스레 배수 상태를 확인하게 되고, 이어 바닥에 설치된 맨홀 뚜껑으로 눈길이 간다. 사람의 출입이 가능한 정도의 큰 구멍이 길바닥에 뚫려 있으니 추락 같은 안전사고 방지와 만반의 지하 구조물 관리를 위해 평소 덮개로 씌워두는 건 당연한 일일 테다.
맨홀 뚜껑이라고 다 똑같은 건 아니다. 뚜껑 표면을 자세히 보면 여러 가지 기하학적인 문양이 요철 형태로 새겨져 있다. 미관상의 목적도 있지만, 사람과 차량이 뚜껑 위에서 미끄러지지 않게 마찰력을 높이려는 기능이 강하다. 맨홀 뚜껑은 비와 눈에도 부식이 적어야 하고 대형 차량의 무게까지 이겨내며 쉽게 파손되지 않도록 단단한 주철로 제작돼 내구성이 뛰어나다. 뚜껑에는 그 용도와 함께 설치·관리 기관의 휘장과 로고, 제원, 제조업체 명칭 등이 표시돼 있어 쓰임새와 설치 시기를 알려 준다. 오랜 세월을 묵묵히 버티고 있는 맨홀 뚜껑 자체는 한 도시, 특정 지역의 역사가 되는 셈이다.
맨홀 뚜껑의 용도는 크게 상수도용, 하수도(오수·우수)용, 전기용, 통신용, 도시가스용으로 나뉜다. 2019년 2월 부산시가 지역 하수 시설 안전관리 차원에서 하수도용 맨홀 뚜껑 정비를 위해 도시정보시스템(UIS)에서 추출한 맨홀만 9만 5216개로 집계됐다. 다른 용처의 맨홀까지 헤아린다면, 부산 시내 전체 맨홀 뚜껑 개수는 몇 배나 늘어나게 된다. 부산의 경우 차도와 보도에서 5~20m 간격으로 각종 맨홀 뚜껑 네댓 개쯤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참고로 2016년 서울시 통계에 따르면, 서울 지역에 59만 4000개의 맨홀이 있었다고 한다. 정확한 수치는 아니지만, 업계는 전국에 산재한 맨홀을 대략 150만 개로 추정하고 있다.
이처럼 도처에 흔하게 널린 맨홀 뚜껑은 지하 구조물 형태에 따라 원형과 정사각형, 직사각형으로 제작된 게 많다. 십중팔구는 원형이다. 맨홀 뚜껑이 거의 대부분 둥근 이유는 원은 모든 방향의 지름이 같아 뚜껑이 원형 구멍에 빠질 염려가 없기 때문. 원형 맨홀 뚜껑은 어떤 방향의 폭도 모두 일정하므로 원형 구멍과 같은 뚜껑을 만들면, 뚜껑이 어떻게 놓이든 상관없이 안전하게 걸쳐져 구멍 속으로 빠지지 않는다. 반면 사각형 뚜껑은 대각선의 길이가 가로·세로에 비해 길어서 홀에 빠질 수 있는 위험이 있다. 그래서 간선도로와 이면도로 등 차도에 쓰이는 맨홀 뚜껑은 원형 제품이 일반적이다. 또 차도용 뚜껑이 자동차의 무거운 하중을 충분히 견디도록 만들어져 보도용에 비해 훨씬 견고하다.
부산에 깔려 있는 수많은 상수도용과 오수·우수용 맨홀 뚜껑은 ‘부산광역시’라는 문구가 적혀 있거나 부산시 휘장이 디자인된 것 일색이다. 1963~1994년 부산직할시 시절의 뚜껑도 있어 휘장의 변천사와 설치 시기를 짐작해 볼 수 있다. 1995년 경남에서 부산으로 편입된 기장군에서는 ‘기장군’ 단독으로 표기된 뚜껑도 보인다. 상수도 배기·제수변과 소화전, 도시가스 밸브 등 중요 시설 맨홀 뚜껑의 경우 ‘주정차 금지’ 표기가 돼 있다. 비상 상황에 대비하고 차량으로 인한 파손을 막기 위해서다. 이들 맨홀과 일부 전기용 맨홀의 뚜껑에는 주차와 굴착 시 사람의 주의를 환기하기 위해 표면이나 주위에 노랑·빨강·파랑 페인트가 칠해져 있다.
사람들이 늘 밟고 다니면서도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는 맨홀 뚜껑은 조용히 도시민들의 생활에 필요한 제 역할을 다하며 역사를 써가고 있다. 고철값이 오르거나 경제난으로 생계형 범죄가 기승을 부릴 때에는 절도범의 주요 표적이 되는 아픔도 겪는다. 가끔씩 관리 부실 탓에 뚜껑이 파손되거나 맨홀이 열려 있다가 안타까운 추락사고와 교통사고를 유발하기도 했다. 관할 지자체와 관리 당국의 철저한 관리가 요구되는 이유다.
급변하는 도시에서 오래된 걸 발견하는 즐거움은 각별할 테다. 재개발과 가로 정비사업, 훼손 등 갖가지 사유로 맨홀 뚜껑을 새것으로 교체할 때 옛것을 없애지 않고 보존할 필요성이 있다. 맨홀 뚜껑은 오랜 세월 우리의 발밑에서 안전을 지켜주며 도시의 진화 과정을 담아 온 문화자산인 까닭이다. 혹자들이 “맨홀 뚜껑은 도시의 지문”이라고 표현할 정도다. 요 며칠 동안 부산 16개 구·군 지역을 누비는 발품을 팔아가며 다양한 형태와 무늬를 지닌 맨홀 뚜껑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 봤다. 이 사진물이 누군가 뜻있는 사람이 부산의 맨홀 뚜껑 역사를 제대로 기록하고 보존하면서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계기로 작용하기를 바란다. 글·사진=강병균 논설위원 kbg@busan.com
■상수도용
상수도관과 연결된 맨홀의 뚜껑은 중앙에 한자 ‘물 수(水)’ 자 문양이 새겨진 게 대부분이다. 매우 드물게 ‘상수도’나 ‘수도’가 표기된 뚜껑도 있다. 세부적으로는 일반 소화전, 소방용 소화전(119), 유량계, 배기변(공기와 가스 배출), 공기변(공기 조절), 제수변(물 흐름 차단·조정) 등 용도가 있다. 표면에 ‘주차금지’라고 표기된 뚜껑이 많다. 이는 위급 상황과 수시 점검에 신속하게 대응할 목적에서다.
■오수용
각 가정의 생활하수 등 각종 오폐수가 흐르는 하수관 중에서도 오수관의 맨홀에 설치된 뚜껑마다 ‘오수’라고 표시돼 있다. ‘하수도’로 표기된 뚜껑이 부산에 아직도 있지만, 막상 찾기는 힘들다. 오수 맨홀 뚜껑은 오수관로에서 발생한 악취가 맨홀을 통해 지상으로 올라오지 않도록 막기 위해 아예 구멍이 없는 게 특징이다. 주택가 이면도로와 골목길에서는 정화조용 맨홀 뚜껑을 쉽게 볼 수 있다.
■우수용
도시 여러 곳에 모인 빗물을 흘려보내는 우수관의 맨홀 뚜껑은 빗물이 지하로 잘 빠질 수 있도록 여러 군데에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우수용 맨홀 뚜껑은 각 제품마다 오수용과 같은 문양의 디자인에 구멍이 곳곳에 나 있는 형태다. 아스팔트와 콘크리트 포장길로 뒤덮인 도시에서 지표수의 원활한 배수를 위해 가장 많이 설치된 맨홀 뚜껑이다.
■공공 디자인 적용
인도 등 보행로에 깔린 각종 맨홀 뚜껑 중에는 각양각색의 보도블록과 조화를 이루게끔 디자인된 것도 있다. 도시 미관을 위해 증가하는 추세다. 특히 부산 중구 광복·중앙동, 동구 범일동, 부산진구 부전동 등 원도심의 일부 특화 거리는 낡고 오래된 맨홀 뚜껑의 교체가 이뤄지면서 용도에 관계없이 모든 뚜껑에 통합된 공공 디자인을 도입했다. 이 과정에서 부산시가 아닌 관할 기초지자체 이름과 지역 상징물을 새긴 뚜껑을 설치했다. 중구 남포동 비프(BIFF)광장의 부산국제영화제 로고를 적용한 맨홀 뚜껑이 대표적이다.
■전기용
전기용 맨홀은 한국전력공사(한전)가 관리한다. 여러 회선의 전력 케이블이 매설된 전력구 입구나 전기 배선 맨홀에 설치된 뚜껑에는 주로 ‘한전’ 또는 ‘전기’라는 글자가 크고 작은 크기로 새겨져 있다. 회사명 대신에 한전의 심벌마크가 있는 뚜껑 디자인도 많이 볼 수 있다. 교통 신호등 제어 등을 위한 경찰용 전기 맨홀 뚜껑도 거리에서 자주 보인다.
■통신용
도시의 땅속에는 전화선은 물론 인터넷망, 이동통신 중계국을 연결하는 통신선이 많이 묻혀 있다. 대로변에선 KT와 SK텔레콤, LG유플러스 등 국내 이동통신 3사의 맨홀 뚜껑을 쉽게 볼 수 있다. KT가 민영화되기 전인 한국통신, 그리고 그 전신인 한국전기통신공사 시기의 로고가 새겨진 뚜껑도 많이 남아 있어 국내 통신기업의 변천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1981년 공기업으로 출범한 한국전기통신공사의 모태가 되는 중앙부처인 체신부에서 설치한 맨홀 뚜껑(중앙에 ‘체’나 ‘체신부’로 표기)까지 지금의 같은 시간에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체신부→한국전기통신공사→한국통신→KT 순이다.
■도시가스용
도시가스관이 지나는 지역 가운데 극히 일부 지점에 관리용 밸브가 있는 맨홀이 있다. 이 맨홀의 뚜껑에는 눈에 잘 띄는 노란색 바탕에 주정차를 금하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차량의 주정차는 물론 접근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가스 누출과 폭발 위험이 있는 시설에 대한 안전한 관리 때문일 것이다.
■서면 한복판의 부산대 뚜껑
부산진구 부전동 쥬디스태화 인근 중앙대로변 보도에 부산대 마크가 찍힌 원형 맨홀 뚜껑이 설치돼 있어 궁금증을 일으킨다. 일반인이 육안으로 보면, 설치 시점과 용도를 알 길이 없다. 주변 상인들에 따르면, 현재 부산경찰청이 신호등 관리 등을 위해 사용하는 시설로 알려졌다. 뚜껑 표면이 꽤 닳은 상태여서 상당히 오래전부터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마도 맨홀 뚜껑 생산업체가 주문량보다 많이 만들어 놓은 제품의 하나가 다른 공사장의 발주 때 끼어 들어가는 바람에 서면에 설치됐을지도 모르겠다.
강병균 논설위원 kbg@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