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래의 메타경제] 경제에 철학이 안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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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대 글로벌경제학과 명예교수

전 세계적인 고물가와 불황의 조짐이 심상치 않다. 누구는 80년 만의 불황이 올지도 모른다고 하고, 또 어떤 이는 50년 만에 다시 보는 불황일 수 있다고도 한다. 불황을 야기하는 원인이나 진행 양상을 보면 1970년대에 겪었던 3차 세계 대불황과 많은 면에서 유사하다. 흔히 석유파동이라고 불렀던 기름값 상승으로 촉발된 세계적인 불황은 정보사회로의 진전이 새로운 활력을 불러올 때까지 오랫동안 세계를 침체에 시달리게 하였다.

경기 침체 속에서도 물가가 오르는 스태그플레이션 현상을 경험하면서, 당시 세계는 해법을 찾아 동분서주하였다. 석유파동으로 물가가 치솟자 각국 정부는 경기 침체에도 불구하고 긴축으로 대응하였는데, 그 결과는 침체의 악화와 실업률 급증이었다. 이에 놀라 수요 진작으로 방향을 틀었지만, 이번에는 물가가 뛰었다.


고물가·불황 최근 경기 심상치 않아

지난달 새 정부 경제정책 방향 발표

실용도 좋지만 큰 비전 제시 없어


물가와 일자리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분명해졌고, 이런 상황은 당시의 경제이론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언제나 현실은 이론을 선도하는 법이다. 대응 방안과 정책 수단이 대거 동원되고 실험되면서 그 경험에서 유용한 논의를 도출하기 시작하였다.

경제학에 심리적 요소인 ‘예상’이라는 말이 들어온 것도 그때였다. 물가가 가파르게 오르는 시기에는 경제주체 모두 물가상승 폭에 대한 예상을 전제하면서 경제 행위를 한다는 것이다. 이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 바로 임금 협상이다. 물가보다 한 템포 늦게 반영될 수밖에 없는 것이 임금이기 때문에, 앞으로 더 큰 물가상승이 예상된다면 그런 부분까지 협상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문제로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깨달았던 것은 예상이라는 족쇄를 깨기 위해서는 정부와 기업 그리고 가계가 한 발짝씩 물러나 예상의 함정에서 같이 빠져나와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경제주체 간 큰 타협이 필요했다. 정부는 물가 억제선을 공언하고 기업은 물건값을 올리지 않으며 노동계는 임금 인상의 적정선을 지킨다는 내용이다. 이 정책을 교과서에선 ‘인력 정책’이라고 했지만, 실상은 사회적 타협이었다. 결국 스태그플레이션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경제주체들의 신뢰가 전제되어야 하였다.

코로나19 팬데믹과 중국 봉쇄로 세계 공급망이 타격을 입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으로 에너지를 비롯한 자원과 식량 공급이 차질을 빚으면서 한국도 물가 급등과 주식시장 폭락의 침체 조짐을 피하지 못하고 있다. 강력한 제조업 기반으로 코로나19 팬데믹의 와중에서도 다른 나라에 비해 위기를 잘 견뎌 온 한국이지만, 공급망 타격이 장기화하고 에너지 가격이 급등하면서 본격적인 타격을 피할 도리가 없어지고 있다.

인플레이션과 경기 침체의 늪에 빠질 경우 우리는 이러한 상황을 함께 극복해 나갈 수 있는 신뢰의 기반이 필요하다. 이는 우리가 외환위기 때 보았던 금 모으기와는 다르다. 인플레이션에 대한 예상을 둘러싸고 경제주체 간에 벌어지는 줄다리기는 가끔은 매우 격렬하고 파괴적이기까지 하다.

새 정부가 출범한 지 두 달이 가까워지고 있다. 대통령 선거운동 기간부터 궁금했던 것인데, 윤석열 정부의 경제정책 기조가 무엇인지 잘 떠오르지 않는다. 취임 직전까지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활동했지만, 다양한 경제정책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발표했다는 기억은 없다. 마침내 지난달 16일 발표된 새 정부의 경제정책 방향에서도 역시 비전 제시는 없었다. 좋게 보면 실용주의지만, 철학의 빈곤이 주는 답답함은 어쩔 수 없다.

강조된 단어들을 조합해 볼 때 감세와 규제개혁, 법인세·보유세 인하와 제도 정비를 통해 민간경제의 활력을 높이겠다는 것이 핵심 정책으로 읽힌다. 익히 들어 본 정책이고, 이미 검증이 끝난 정책도 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그러한 정책들이 지금의 경제위기를 극복하는 데 과연 적절한가 하는 점이다.

대기업과 부유층의 부담을 줄여 주겠다는 정부가 연일 과도한 임금인상 자제 메시지를 내놓고 있다. 임금인상이 물가상승을 자극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임금 인플레이션’을 미연에 방지하겠다는 뜻으로 보이지만, 큰 물가상승이라는 예상이 작동하는 상황에서는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당면한 경제 문제를 실용적으로 풀어 가는 것이 주요한 대안이 될 수는 있다. 그러나 철학 없는 실용은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또 다른 문제를 발생시킨다. 1970년대의 불황을 통해 학습하였듯이 경제주체들의 타협을 끌어내지 않고는 스태그플레이션을 극복할 수 없다. 실용에 앞서 최소한 통합의 철학은 가지고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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