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영의 시인의 서재] 늙은 바다와 아버지의 초상
시인·‘시와사상’ 편집위원
장마 탓인지 이불과 옷장에 습기가 스며든다. 후텁지근한 여름이 오면 문득 ‘연인’이란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작품인데, 식민지 시대의 베트남 풍경과 열정적인 사랑이 강한 여운을 준다. 여름에 어울리는 말은 ‘바다’ ‘초록’ ‘태양’ 그리고 ‘청춘’이다. 여름 해변이라는 말에 어울리는 꽃은 수국이다. 비에 젖은 수국 꽃잎은 얼마나 감미로운가.
6월 한국비평이론학회 30주년 학술대회에 참석했다. 삼십 년은 어른이 된다는 말이다. 학회에서 발간한 논문에 인용된 비평 이론가들을 지도로 제작하여 학문의 흐름을 살피는 게 흥미로웠다. 한 시대를 풍미하는 사상도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동그라미처럼 표시된 공간으로 영향력을 표시한 지도를 보니 신기했다. 독창적인 철학이나 비평 이론을 전개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K팝처럼 전 세계인의 사유에 혁신적인 빛을 던져 줄 한국 철학자의 출현을 기다린다. 철학 분야 역시 서구의 담론을 수입해 인용하고 한국 문헌과 비교하거나 확장하는 경향이 우세한 듯하다.
자전적 시로 미국 시단 이끈 로버트 로월
인간 내면 비루한 심리 묘사 인상적
‘노인의 도시’ 부산에 대한 연민 오버랩
학회에서 발표를 마친 K 교수님이 부산에 하루 더 체류하려 하니 관광 명소를 소개해 달라고 했다. 미포에서 송정까지 이어지는 해변열차가 해운대와 광안리를 이미 다녀온 사람에게 좋을 것 같았다. 부산의 관광지를 추천하던 중에 그분이 부산을 ‘노인과 바다’라고 부른다면서 농담을 했다. 그 말에 다들 웃었지만 도시가 늙어 간다는 은유여서 조금 씁쓸했다. 여름 해변에서 젊은 축제가 열리지만 부산이 늙어 간다는 말처럼 들렸다. 인구의 절반이 수도권에 사는 기형적인 현상으로 다른 지역들은 소외되고 낙후되어 간다.
시장 보기가 겁날 정도로 물가가 올라 시민들의 시름이 깊다. 전기와 가스 요금도 곧 오를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원자력 발전소를 다시 부흥시키려는 정부의 방침이 발표되었다. 원전은 양날의 검처럼 장점도 있지만 핵폐기물 문제와 같은 단점도 공존하다. 원전 근처의 지역민에게는 전기료를 삭감해 주는 것이 좋을 것이다. 지역에 살면 더 많은 혜택을 주는 정책을 정부가 주도적으로 추진해 나가면 수도권의 인구를 적절하게 분산할 수 있지 않을까.
늙어 가는 바다를 보면서 〈인생 연구(Life Studies)〉라는 시집을 출간한 미국 시인 로버트 로월(Robert Lowell)을 떠올렸다. 미국 시단에서 고백파 시를 창시한 그는 유명한 실비아 플라스와 앤 섹스턴의 스승이기도 하다. 인간 내면의 비루한 심리를 저 밑바닥까지 드러내는 시적 경향은 후대의 시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자신의 가족사를 소재로 삼아 이 시집에서 긴 산문시를 썼는데, 한 편의 단편 소설을 읽는 듯하다. 그런데 소설과는 다른 팽팽한 긴장감이 살아 있다. 최근에 다시 읽어도 더 좋은 것을 보니 명작의 힘이다.
로월은 해군 중령으로 퇴직한 아버지를 소재로 ‘로월 중령(Commander Lowell)’이라는 시는 썼는데 깊은 공감을 준다. 미국의 아버지나 한국의 아버지나 별다른 차이가 없는 것 같다. 직장에서 은퇴한 남성들의 무기력과 허세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해군을 떠난 아버지는/어머니에게 재산을 양도했다//그는 곧 해고되었다. 해마다,/그는 욕조에서 “닻을 감아올리고” 노래를 부르며 흥얼거렸다/직장을 그만둘 때마다/그는 근사한 자동차를 샀다.’
새로운 희망을 품고 은퇴했지만 사회생활이 만만치 않는 남자들의 일상이 느껴진다. ‘닻을 감아올리고’는 해군의 군가인데 그 우렁찬 노래를 작은 욕조에서 흥얼거리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연민의 감정이 올라온다.
로월은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시위를 주도해 감옥까지 간 용기 있는 시인이지만, 소심하고 여린 성격도 감지된다. 우울증을 앓았고 정신병원에서 겪은 체험이나 이혼 후의 복잡한 심경을 그는 시 속에 자세하게 묘사한다. 섹스턴이 산문집에서 그를 ‘부드럽고 다정한 사람’으로 쓴 것을 발견하고 마치 그들을 만난 듯이 반가웠다. 로월의 시는 낭송을 하기에도 멋있었던 것 같다. 영화 ‘실비아’에서도 플라스와 테드 휴즈가 로월의 시 낭송 녹음을 듣고 대화하는 장면이 나온다.
레즈비언 시인이었던 엘리자베스 비숍과의 오랜 우정도 미국 문학사에서 유명하다. 박사학위 주제로 로월을 선택하고 그의 시를 번역하면서 힘겹게 논문을 썼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때 번역한 초벌 원고가 가만히 잠자고 있는데 기회가 되면 책으로 엮어야겠다. 그가 살아 있다면 미국으로 건너가 만나고 싶다. 먼 이국에서 그의 시를 치열하게 연구한 시인이 있었다는 얘기를 전해 주고 싶다. 어쩌면 사랑일 것이다. 뜨거운 연인처럼 사랑하는 것들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