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우크라 전쟁 여파… ‘에너지·반도체 전쟁’도 불붙었다
러 가스 공급 축소로 EU 큰 타격
독일, 공공건물 뜨거운 물 금지
각국 러 의존도 낮추기에 박차
미, 중 견제 위해 반도체법 추진
기술 우위 확보 364조 투자키로
중, 기업 보조금 지원 확대 ‘맞불’
반도체, 에너지 산업을 둘러싼 신냉전 국가들의 패권 전쟁이 가속화될 전망이다. 기존 세계시장을 주도하는 러시아와 중국의 반복되는 ‘자원 무기화’ 움직임에 맞서 미국과 서방이 분주히 대체 활로를 찾는 형국이다. 특히 러시아의 가스 공급 축소로 경제가 흔들리고 있는 유럽은 완전한 에너지 독립을 목표로 장기 로드맵을 짤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가 유럽으로 가는 가스관을 잠그면서 현재 가장 큰 타격을 입은 곳은 독일이다. 독일 가구는 연간 최대 1000유로(약 132만 원)의 가스요금 인상 폭탄을 맞게 됐다. 독일 정부가 가스값 폭등에 따라 오는 10월부터 에너지기업이 가구와 기업 등 가스 소비자에게 시장의 가격상승분을 떠넘기는 것을 허용했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올 2월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유럽에 대한 보복 차원으로 천연가스 공급을 줄여왔다.
독일은 1킬로와트시(kWh)라도 아끼기 위해 각종대책을 동원하고 있다. 하노버시는 공공건물, 수영장, 체육관 등에서 샤워할 때 뜨거운 물을 쓰지 않기로 했다. 시청, 박물관 등 주요 건물의 야간 조명도 끈다. 어린이집, 병원 등 일부를 제외한 공공건물의 난방 시간도 단축한다. 에너지 위기에 따라 독일의 경우 2분기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이 전 분기 대비 0%로 추정됐다.
다행히 다른 유럽 국가의 사정은 그나마 낫다. 유럽연합 통계기구인 유로스타트는 지난달 29일 유로존의 2분기(4∼6월) GDP가 직전 분기보다 0.7% 증가했다고 밝혔다. 에너지, 식량 가격 급등에도 경제 위축을 어느 정도 방어한 셈이다.
그러나 WSJ에 따르면 투자은행 UBS 이코노미스트들은 러시아의 가스 공급 차단으로 에너지 배급제가 실시될 경우 유로존 경기가 내년 상반기까지도 심각한 수축을 겪을 수 있다고 전망했다.
이같은 사태를 겪으며 유럽 각국은 러시아산 가스 의존도를 대폭 줄이는 경제정책을 추진한다. 이탈리아 최대 에너지기업 에니는 지난달 29일 발표한 2분기 사업보고서에서 2025년께 러시아산 가스에서 완전한 독립을 이루겠다는 목표를 공개했다. 이탈리아가 최근 알제리, 이집트 등 아프리카 국가와 신규 가스 공급 계약을 맺었고, 리비아, 앙골라, 모잠비크 등과도 추가 계약이 이뤄질 수 있다고 언급했다.
G2(미국, 중국)의 반도체 개발 전쟁도 뜨겁다. 미일 상무·외교 장관은 지난달 29일 워싱턴DC에서 첫 2+2 회의를 열고 차세대 반도체 개발을 위한 공동 연구센터 건립에 합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미국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반도체 산업 육성에 주력하고 있다. 미 하원은 지난달 28일 반도체 산업 발전과 기술적 우위 유지를 위해 2800억 달러(약 364조 원)를 투자하는 ‘반도체 및 과학법’을 통과시켰으며, 바이든 대통령은 이번 주 초 법안에 서명할 예정이다.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은 기자회견에서 “중국의 강압적이고 보복적인 경제 행위는 세계 각국이 안보를 위해 지적 재산과 경제적 독립을 포기하도록 몰아세우고 있다”고 말했다.
중국도 미국의 차세대 반도체 선점 행보에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중국 관영통신 신화사에 따르면 상무부 대변인은 미국 의회의 반도체법 처리에 대해 “미국 본토 반도체 산업에 거액의 보조금을 주는 것은 차별적인 산업 육성책의 전형”이라면서 “전 세계 반도체 공급망을 왜곡하고 국제 무역에 교란을 조성할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도 반도체 기업에 대한 보조금 지원 확대에 박차를 가한다. 중국 광둥성 남부 헝친 특별경제구는 지난달 27일 현지에 사무실을 개설하거나 연구·개발 활동을 진행하는 반도체 기업에 최대 3000만 위안(약 58억 원) 보조금을 지원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밖에 중국과 러시아는 이란 등 ‘반미 국가’와 아프리카 국가를 잇따라 찾으며 식량, 에너지 등 자원 외교에 속도를 내고 있다.
이승훈 기자 lee88@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