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성원 칼럼] 지방시대냐 수도권 시대냐
논설실장
윤 대통령 취임 100일 맞아
지역서 일제히 ‘지방 없는 국정’ 질타
취임 전 ‘지방시대’ 수사 차고 넘쳐
출범 후엔 수도권 초집중 드라이브
‘어디서나 살기 좋은 지방시대’
부산 엑스포 유치전부터 초심 회복을
만법귀일. 중국 송나라 때 불교 선승들의 선문답을 모은 〈벽암록〉에 나오는 ‘1700 공안’ 중 하나다. 모든 것이 마침내 한군데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한 수행자가 당대의 선승 조주를 찾아와 ‘모든 것은 하나로 돌아간다는데,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갑니까’(萬法歸一 一歸何處)라고 물은 데서 유래한다.
윤석열 대통령 취임 100일을 맞아 지방이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윤 정부의 국정에 ‘지방은 없다’는 것이다. 초록은 동색이라지만 지역언론이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지방 없는 국정’을 일제히, 그것도 매섭게 질타하고 나섰다. 지역 대표 언론의 사설만 대충 훑어봐도 금방 알 수 있는 일이다. 지방마다 사는 처지가 사뭇 다를 터인데, 지역 민심이 이렇듯 하나로 모인 것은 일찍이 유례를 찾기 힘든 일이다.
17일 윤 대통령 취임 100일 회견에서도 ‘지방’ 혹은 ‘지역’은 눈을 씻고 찾아도 없었다. 대통령은 “국정운영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첫째도 둘째도 국민의 뜻”이라며 “민심을 겸허히 받들겠다”고 했다. ‘지방 없는 국정’에 등을 돌린 지역은 ‘국민’과 ‘민심’이라는 대통령의 말에서도 지방의 설 자리는 없다는 데 자괴감을 느껴야 했다. 사방에서 지방이 안 보인다고 아우성치는데, 앞으로 국정은 어떻게 될까.
양두구육. 중국 송나라 때 불교 선종의 역사를 다룬 〈오등회원〉에 나오는 말이다. 집권당 대표가 대통령을 저격하면서 세간에 회자하는데, ‘양의 머리를 걸어 놓고 개고기를 판다’(羊頭狗肉)는 뜻이다. 원문의 소머리가 양머리로, 말고기가 개고기로 바뀌었다고 하는데 여권에서는 때아닌 개고기 논쟁이 한창이다. 〈능엄경〉에 ‘달을 가리키면 달을 봐야지 손가락 끝은 왜 보나’는 말이 있다. 그런데 지역 민심에서도 양두구육이 읽힌다.
이준석 국민의힘 전 대표는 대통령과 집권당 원내내표의 ‘내부총질’ 문자에 양두구육으로 응수했다. 그는 “양두구육이라는 탄식은 저에 대한 자책감 섞인 질책이었다”며 “(선거 과정에서) 양의 머리를 내걸고 개고기를 가장 열심힌 판 사람은 바로 저였다”고 고백했다. 표를 얻기 위해 공약을 남발했다는 해석이 가능한 대목이다.
지방 곳곳에서 ‘지방은 없다’는 목소리가 높아 가지만 윤 대통령 취임 전에는 ‘지방시대’라는 수사가 차고도 넘쳤다. “지역발전이 국가 발전” “지방시대라는 모토를 가지고 새 정부를 운영할 생각”이라던 윤 대통령은 마침내 ‘대한민국 어디서나 살기 좋은 지방시대’를 6대 국정 목표 중 하나로 내걸었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균형발전을 위해 묶어 둔 수도권 규제의 빗장을 풀고, 반도체 인재 양성을 이유로 수도권 대학의 정원을 늘리는가 하면 부총리급 독립부처 신설을 내건 지방시대위원회는 자문기구로 쪼그라들 판이다.
“수도권 시설을 지방으로 강제 이전해 수도권과 지방의 격차를 줄이는 정책은 실패했다”며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이 공공기관 지방 이전에 반기를 들고, “수도권과 지역을 나누는 이분법을 버리고 전 지역을 수도권화해야 한다”고 양향자 국민의힘 반도체산업 경쟁력 강화 특별위원회 위원장이 장단을 맞췄다. 지방시대가 아니라 ‘수도권 시대’에나 가능한 말이다.
균형발전. 고전에서가 아니라 ‘지금 여기’의 오늘에 펄펄 살아 있는 화두다. 가까운 일본에서부터 멀리 프랑스에 이르기까지 중앙집중과 지방소멸이 있는 곳이라면 균형발전(均衡發展)은 어김없이 정책 대안으로 등장한다. 국토의 12%에 불과한 수도권에 총인구 50.3%, 청년인구 55.0%, 일자리 50.5%, 1000대 기업 86.9%가 쏠린 한국(산업연구원 2022년 보고서)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전국의 지방언론뿐 아니라 시민사회단체들도 지리멸렬한 균형발전 정책을 비판하고 나섰다. “윤 정부는 집권 초기부터 지방시대가 아니라 수도권 시대, 균형발전이 아니라 수도권 초집중을 강화하는 정책을 추진하며 지방분권과 균형발전을 외면하고 있다”는 거다. 이어 2차 공공기관 이전과 초광역 지방정부 구축을 통해 지방시대를 이끌 부총리급 정부 전담 부처 설치를 강력히 촉구했다.
지방소멸 시대에 국정이 가야 할 길은 당연히 균형발전이다. 국정 지지도가 20%대로 떨어지자 여름휴가를 마치고 돌아온 윤 대통령은 “초심을 지키며 국민 뜻을 받들겠다”고 했다. 당장 2030 부산세계박람회 유치전부터 지방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정부가 진정 엑스포 유치를 바란다면 가덕신공항 건설 계획, 공법, 사업자 선정 등을 국토부가 아닌 부산시가 주도하도록 권한을 부여해 줄 것을 제안한 박형준 부산시장의 요청을 전격 수용해야 한다. “내치 권한을 지방으로 대폭 이양하겠다”는 것은 윤 대통령이 시장·도지사 간담회에서 직접 한 말이다. 지방시대냐 수도권 시대냐, 대통령이 분명하게 응답할 차례다.
임성원 기자 forest@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