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광복회 총사령 지낸 증조부 훈격 상향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박상진 의사 증손자 박중훈 씨
현재 3등급 독립장서 상향 무산
울산시 10만 서명부 제출에도 물거품
“대중적 인지도 높이고 재평가 필요”
올해 광복절을 며칠 앞두고 고헌 박상진(1884~1921) 의사 생가터에 씁쓸한 소식 하나가 전해졌다. 광복회 총사령을 지낸 박 의사의 서훈 등급 상향이 무산됐다는 내용이었다. 항일투쟁사에서 가장 빛나는 활약을 펼치고도 제대로 된 평가조차 받지 못한 독립 영웅.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지난 17일 오후 울산 북구 송정동 박상진 의사 생가에는 찌는 듯한 폭염에도 방문객의 발길이 간간이 이어졌다. ‘생가 지킴이’ 박중훈(68) 씨가 사람 좋은 웃음을 띠며 기자를 반겼다. 박 의사의 증손자인 그는 최근 증조부 훈격 상향이 좌절됐다는 소식에 “어렵다는 것은 진작 알았지만…”이라며 못내 아쉬움을 혼자 다독였다고 한다. 박 씨는 “주변에서 워낙 많은 이들이 도와줘 오히려 (내가) 미안했다”며 “10만 서명부에 동참한 울산 시민의 노력과 관심이 무산된 것 같이 느껴져 그것이 더욱 가슴 아팠다”고 말했다.
해방 이후 1963년 정부가 졸속으로 박 의사에게 독립유공자 3등급(독립장)을 추서하면서 그의 공적과 삶이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다. 공적에 비해 훈격이 낮다는 지적이 오랫동안 제기됐다. 울산시는 지난해 박 의사 순국 100주기를 맞아 추서 당시 누락된 공적 일부를 보완해 국가보훈처에 재심사를 요청했다. 추가 공적에는 △광복회 조직을 통한 전국 부호들로부터 독립 군자금 모집 △일제가 거둔 경북 우편마차 세금 탈취(1915) △평북 운산금광 현금 수송마차 습격(1916) △대구 친일 부호 처단(1916) 등 굵직한 활동이 다수 포함됐다. 박 의사의 부친 박시규 선생이 쓴 제문(祭文)을 토대로 중국, 인도에서 박 의사의 구국 활동이 집중 조명된 일화 등 민족정기 선양에 공헌한 점도 부각했다. 여기에 박 의사 훈격 상향을 바라는 10만 1400여 명 국민 서명부도 전달했다.
박 씨는 “서훈 확정 이후에는 대상자 공적을 재평가하는 게 매우 어렵다고 한다. 증조부 훈격을 상향할 경우 다른 지역에서도 같은 요청이 잇따를 수 있다는 부담도 작용했을 것”이라며 “고조부가 쓴 제문을 사적인 기록이라고 판단해 신뢰성을 낮게 봤을 수도 있다. 국가보훈처에서 공식 입장이 오면 미비점이 무엇인지 파악해 대응하겠다”고 말했다.
박 의사는 36년 짧은 생애 동안 13년을 독립운동에 헌신했으나, 워낙 잦은 수색 때문인지 편지글 하나 남아있지 않다. 박 의사의 대중적 인지도를 높이고, 재평가하는 작업이 꼭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박 씨는 “사진도 원래 어머니 말로는 3장 있던 것이 이제 딱 한 장만 남았다”며 “그나마 민주중보(民主衆報·1945~1949)에 실린 증조부의 새로운 모습이 최근 발견돼 정말 반가웠다”고 했다. 부산지역 일간지이던 이 신문의 1946년 1월 3일 자에 광복회 군사연락기관인 상덕태상회에서 찍은 박 의사 모습이 실려 있다.
박 의사 순국 뒤 유족과 후손은 대대로 가난과 갖은 고초에 시달렸다고 한다. 박 의사의 부인 최영백 여사가 81세 나이에 먹을 양식도 없이 냉방에서 병마와 굶주림에 신음한다는 기사가 <부산일보> 1961년 3월 5일 자에 실리기도 했다. 박 씨는 “어릴 적 그 기사가 보도되고 부산일보에 가서 장학금을 받아 온 가족이 고깃국을 먹은 기억이 난다”며 웃었다. 박 씨는 부산상고를 나와 회계 쪽 일을 하다가 2007년 4월부터 증조부 생가를 돌보며 박 의사에 대한 연구와 집필 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박 의사 훈격 상향을 바라는 시민 열망은 이렇게 무위로 돌아가는 것일까. “워낙 남겨진 자료가 없어서…. 관건은 대중적 인지도를 더욱 높이는 데 있습니다. 증조부의 독립운동과 국위선양을 널리 알리는 데 힘써야지요. 계속 방법을 찾고, 연구하고, 노력할 겁니다.” 수많은 시민의 정성과 염원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얘기로 들렸다.
권승혁 기자 gsh0905@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