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광복회 총사령 지낸 증조부 훈격 상향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권승혁 기자 gsh0905@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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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진 의사 증손자 박중훈 씨

현재 3등급 독립장서 상향 무산
울산시 10만 서명부 제출에도 물거품
“대중적 인지도 높이고 재평가 필요”


광복회 총사령 박상진 의사의 증손자 박중훈 씨가 울산 북구 송정동 박상진 의사 생가에 앉아 “증조부의 독립 운동 정신과 민족정기 선양을 알리는 데 힘쓰겠다”며 “비록 서훈 등급 상향이 이번에 무산됐지만 관심과 정성을 쏟은 울산 시민에게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권승혁 기자 광복회 총사령 박상진 의사의 증손자 박중훈 씨가 울산 북구 송정동 박상진 의사 생가에 앉아 “증조부의 독립 운동 정신과 민족정기 선양을 알리는 데 힘쓰겠다”며 “비록 서훈 등급 상향이 이번에 무산됐지만 관심과 정성을 쏟은 울산 시민에게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권승혁 기자


올해 광복절을 며칠 앞두고 고헌 박상진(1884~1921) 의사 생가터에 씁쓸한 소식 하나가 전해졌다. 광복회 총사령을 지낸 박 의사의 서훈 등급 상향이 무산됐다는 내용이었다. 항일투쟁사에서 가장 빛나는 활약을 펼치고도 제대로 된 평가조차 받지 못한 독립 영웅.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지난 17일 오후 울산 북구 송정동 박상진 의사 생가에는 찌는 듯한 폭염에도 방문객의 발길이 간간이 이어졌다. ‘생가 지킴이’ 박중훈(68) 씨가 사람 좋은 웃음을 띠며 기자를 반겼다. 박 의사의 증손자인 그는 최근 증조부 훈격 상향이 좌절됐다는 소식에 “어렵다는 것은 진작 알았지만…”이라며 못내 아쉬움을 혼자 다독였다고 한다. 박 씨는 “주변에서 워낙 많은 이들이 도와줘 오히려 (내가) 미안했다”며 “10만 서명부에 동참한 울산 시민의 노력과 관심이 무산된 것 같이 느껴져 그것이 더욱 가슴 아팠다”고 말했다.

해방 이후 1963년 정부가 졸속으로 박 의사에게 독립유공자 3등급(독립장)을 추서하면서 그의 공적과 삶이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다. 공적에 비해 훈격이 낮다는 지적이 오랫동안 제기됐다. 울산시는 지난해 박 의사 순국 100주기를 맞아 추서 당시 누락된 공적 일부를 보완해 국가보훈처에 재심사를 요청했다. 추가 공적에는 △광복회 조직을 통한 전국 부호들로부터 독립 군자금 모집 △일제가 거둔 경북 우편마차 세금 탈취(1915) △평북 운산금광 현금 수송마차 습격(1916) △대구 친일 부호 처단(1916) 등 굵직한 활동이 다수 포함됐다. 박 의사의 부친 박시규 선생이 쓴 제문(祭文)을 토대로 중국, 인도에서 박 의사의 구국 활동이 집중 조명된 일화 등 민족정기 선양에 공헌한 점도 부각했다. 여기에 박 의사 훈격 상향을 바라는 10만 1400여 명 국민 서명부도 전달했다.


광복회 총사령 박상진 의사의 증손자 박중훈 씨가 울산 북구 송정동 박상진 의사 생가에 앉아 “증조부의 독립 운동 정신과 민족정기 선양을 알리는 데 힘쓰겠다”며 “비록 서훈 등급 상향이 이번에 무산됐지만 관심과 정성을 쏟은 울산 시민에게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권승혁 기자 광복회 총사령 박상진 의사의 증손자 박중훈 씨가 울산 북구 송정동 박상진 의사 생가에 앉아 “증조부의 독립 운동 정신과 민족정기 선양을 알리는 데 힘쓰겠다”며 “비록 서훈 등급 상향이 이번에 무산됐지만 관심과 정성을 쏟은 울산 시민에게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권승혁 기자

박 씨는 “서훈 확정 이후에는 대상자 공적을 재평가하는 게 매우 어렵다고 한다. 증조부 훈격을 상향할 경우 다른 지역에서도 같은 요청이 잇따를 수 있다는 부담도 작용했을 것”이라며 “고조부가 쓴 제문을 사적인 기록이라고 판단해 신뢰성을 낮게 봤을 수도 있다. 국가보훈처에서 공식 입장이 오면 미비점이 무엇인지 파악해 대응하겠다”고 말했다.

박 의사는 36년 짧은 생애 동안 13년을 독립운동에 헌신했으나, 워낙 잦은 수색 때문인지 편지글 하나 남아있지 않다. 박 의사의 대중적 인지도를 높이고, 재평가하는 작업이 꼭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박 씨는 “사진도 원래 어머니 말로는 3장 있던 것이 이제 딱 한 장만 남았다”며 “그나마 민주중보(民主衆報·1945~1949)에 실린 증조부의 새로운 모습이 최근 발견돼 정말 반가웠다”고 했다. 부산지역 일간지이던 이 신문의 1946년 1월 3일 자에 광복회 군사연락기관인 상덕태상회에서 찍은 박 의사 모습이 실려 있다.

박 의사 순국 뒤 유족과 후손은 대대로 가난과 갖은 고초에 시달렸다고 한다. 박 의사의 부인 최영백 여사가 81세 나이에 먹을 양식도 없이 냉방에서 병마와 굶주림에 신음한다는 기사가 <부산일보> 1961년 3월 5일 자에 실리기도 했다. 박 씨는 “어릴 적 그 기사가 보도되고 부산일보에 가서 장학금을 받아 온 가족이 고깃국을 먹은 기억이 난다”며 웃었다. 박 씨는 부산상고를 나와 회계 쪽 일을 하다가 2007년 4월부터 증조부 생가를 돌보며 박 의사에 대한 연구와 집필 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박 의사 훈격 상향을 바라는 시민 열망은 이렇게 무위로 돌아가는 것일까. “워낙 남겨진 자료가 없어서…. 관건은 대중적 인지도를 더욱 높이는 데 있습니다. 증조부의 독립운동과 국위선양을 널리 알리는 데 힘써야지요. 계속 방법을 찾고, 연구하고, 노력할 겁니다.” 수많은 시민의 정성과 염원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얘기로 들렸다.


권승혁 기자 gsh0905@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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