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기후우울증 시대

박세익 기자 run@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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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익 지역사회부장

기후변화 대응에도 더 가열되는 지구
대량생산·대량소비 시스템도 제자리
‘역대급’ 재앙 행진 경로 바꾸려면
전 구성원, 말 아닌 실천만이 살 길

최근 어찌어찌 자리를 함께하게 된 도연 스님이 말씀하셨다. “아니 글쎄, 강서구 쓰레기 매립장에 사진을 찍으러 갔다가 정말 충격을 받았어요.” ‘산새 스님’으로 잘 알려진 그는 경기도 포천에서 산새마을 자연학교를 운영하며 다양한 환경 보호 활동을 한다. 새집을 만들어 숲에 놓고, 자연과 함께 호흡하며 수행하는 것이다.

스님을 놀라게 한 건 재활용 쓰레기였다. 철새인 독수리 무리를 탐조하러 갔다가 부산시민들이 애써 분류해 모은 재활용쓰레기의 운명을 목도한 것이다. “그 아까운 걸 거의 다 파묻더라고. 재활용할 방법도 인력도 없어서 그런 것 같아요.” 스님의 얼굴에 안타까운 표정이 역력했다.


종말을 거론할 정도의 기후 변화 속에서, 재활용품 분류라도 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나마 환경을 위해 일조하고 있다는 안도감을 준다. 그런데 실상은 다들 ‘허튼짓’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대로라면 종량제 쓰레기봉투 비용을 줄여주는 것 말고는 우리 사회에 득이 될 일이 있을까 싶다. 일회용품과 플라스틱을 마구 버리고는 광활한 땅 어딘가에 묻어 버리는 미국인들과 다를 게 없다.

그러는 사이에 서울 강남에 이어, 태풍 힌남노가 400mm 물 폭탄을 포항에 쏟아부었다. 여러 명이 소중한 목숨을 잃는 참극이 또 일어나고 말았다.

물론 오해이겠지만, 공교롭게도 수도 서울 중심부에 기후변화의 재앙이 닥친 뒤 사뭇 다른 분위기를 느낀다. 전과 다르게 태풍 힌남노가 역대급 태풍이라며 모든 공공기관이 총동원되는 등 온 나라가 들썩였다. 기후변화는 당장 눈앞에 닥친 나의 일이라고 수많은 전문가와 활동가들이 외쳐 왔지만 이런 적은 없었다. ‘남쪽 지방’이 물에 잠기든, 불에 타든 말든, 방송 광고 수익을 올려 주는 드라마와 예능 프로그램을 ‘본방 사수’하던 그들이다.

이제 매년 더 센 역대급 태풍이 탄생할 것이고, 더 어마어마한 역대급 산불, 역대급 가뭄, 역대급 폭염, 역대급 미세먼지가 이어질 것이다. 그동안 세계 최고의 과학자들이 모여 6차례나 내놓은 IPCC(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 보고서에 따른 팩트다.

국민들이 물 폭탄, 불 폭탄이 어디에 떨어질지 몰라 불안에 떠는 시대다. 그래서인지 ‘기후우울증’이라는 말이 낯설지 않다. 기후위기를 겪는 이들이 불안과 스트레스, 무기력감, 분노 등 우울증을 갖게 되면서 등장한 말이다. 그냥 지어낸 신조어 정도가 아니라, 올 6월 세계보건기구가 기후우울증의 심각성을 경고하기도 했다. 점점 더 많은 이들이 시나브로 전에 없던 이 병에 걸릴 것이다. 특히 청소년 등 이른바 MZ세대에게 기후변화 위기는 생사가 달린 이슈다.

늘 그렇듯, 문제는 자본이다. 기후변화 대응을 위해 아무리 채식을 하고 탄소 제로를 외쳐도, 자본의 힘 앞에선 모든 것이 무용지물이다. 산업혁명 이후 인류의 소비량은 어마어마하게 폭증했다.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구조를 파탄 내지 않는 한 공염불이다.

심지어 자본주의는 기업을 ‘연기의 달인’으로 만든다. 어디든 ‘친환경’을 갖다 붙여 소비자 경계심을 무너뜨리고 지갑을 열게 한다. 이른바 ‘그린 워싱(Greenwashing·위장 환경주의)’이다. 소비된 ‘짝퉁 유기농·친환경 제품’은 우리 아이들 손에 쥐어지고, 그렇게 흡수된 환경 호르몬은 대대손손 큰 재앙을 초래할 것이다.

우리에게 닥친 가장 큰 위기가 무엇인가. 이 질문을 받은 많은 사람들이 ‘기후변화’라고 답한다. 하지만 구호만 외치는 ‘머리’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정작 편리함과 익숙함에 ‘몸’을 맡긴 이들은 지구를 더 뜨겁게 하는 원인이다.

지난달 15일 부산 영화의전당에서 제1회 하나뿐인지구영상제가 막을 내렸다. 부산에서 시도된 국내 첫 ‘기후변화 특화 영상제’라는 점에서 아주 소중한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첫 행사인데도 20개국 다큐멘터리 39편을 1만 4787명이 관람하는 성과를 냈다. 부대행사인 ESG국제컨퍼런스에도 국내외 전문가들이 한데 모여 의미 있는 논의를 이어갔다.

“우리는 이제 생사의 갈림길에 놓여 있고, 생태적 전환이 필요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기후변화 재앙을 막을 생태백신, 행동백신이 절실합니다.” ESG컨퍼런스에 참여한 이화여대 생명과학부 최재천 석좌교수의 냉철한 진단이다.

힌남노가 남긴 상처에서 보듯, 초고가·초고층 아파트 건설이 멈추지 않는 부산 해안이 더 이상 선망의 대상이 되지 않을 날이 멀지 않았다.


박세익 기자 run@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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