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이 시대 대한민국 여성의 불안

이현우 기자 hoore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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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우 사회부장

얼마 전 어느 여성과 이야기하다 조금 놀랐다. 그는 늘 자신의 안전이 염려된다고 했다. 집을 나오면 온전히 마음 놓고 거리를 다니지 못한다고 했다. 여성을 향한 범죄 소식에 늘 예민하게 반응하게 된다고 했다. 밤길을 걷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면서 무언가 모를 두려움을 완전히 떨치기는 어렵다고 했다. 그의 마음 한구석에 도사린 불안감이 엿보였다. 당황스러웠다.

이 시대 부산이, 대한민국 거리가 불안하다니. 치안 수준이 세계에서 가장 나은 축에 속하는 환경이 아니냐고 그에게 되물었다. 적어도 남성에게는 그럴 수도 있겠다는 답이 돌아왔다. 놀랐지만 ‘너무 예민한 여성일 수도 있겠다’고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말았다.


세계 최고 수준 치안 환경 속

안전 염려 높은 한국 여성들

“여성 안전 일상적으로 위협받아”


또다시 스토킹 살인 범죄 충격

“살아서 퇴근하고 싶다” 절규

여성 보호 사회적 시스템 절실


그리고 얼마 뒤 다시 조금 더 놀라게 되는 상황을 맞았다. 방청객이 많은 토론회 자리였다. 가족이 다 같이 행복할 수 있는 사회환경을 만드는 방법을 고민하는 시간이었다. ‘가족’을 주제로 진지한 이야기가 오가는데, 토론자인 변정희 여성인권지원센터 ‘살림’ 상임대표가 갑자기 ‘읍·면·동별 성폭력 위험지역 10위’ 자료를 제시했다. 부산 중구 남포동, 부산진구 부전1동이 나란히 국내 1·2위였다. 인구 1만 명당 5대 범죄율도 부산 중구가 전국에서 가장 높았다. 부산 동구(6위)와 부산진구(9위)도 순위가 높았다. 살인 강도 절도 폭력 성폭력이 5대 범죄에 속했다. 변 대표는 “여성 안전이 일상적으로 위협받고 있다”고 했다. ‘가족 친화적 사회환경’을 논하는 자리에서 여성 대상 범죄가 주제어로 나오는 게 사실 좀 의아했다. 그러나 며칠 전 다른 여성과 나눈 대화 내용이 오버랩되자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여성들은 늘 불안하구나.’ 약간의 당황스러움은 어느새 공감과 반성으로 이어졌다.

이어 또 며칠 뒤. 밤 시간 택시 안이었다. 조수석에 앉은 20대 여성 후배가 목적지를 말했는데 택시 운전사는 다짜고짜 “모른다”고 했다. 여러 명이 타서 너무 가까운 곳으로 가자고 해 좀 언짢았던 모양이다. 국립 ○○학교 등 누구나 잘 아는 장소로 목적지를 두어 번 더 말했는데도 모르겠다고 짜증을 냈다. 여성은 반사적으로 자신의 휴대전화를 꺼내 재빠르게 내비게이션을 켰다. 뒷좌석에 조용히 있던 중년 남자가 보다 못해 큰소리를 냈다. “부산 지리도 모르고 택시 면허는 어떻게 받았느냐”고 했더니 운전사는 그제야 조용히 목적지까지 차를 몰았다. 내비게이션을 껐는데도 운전사는 스스로 목적지를 잘 찾았다. 마지막에 운전사는 “죄송하게 됐다”고 사과했다. 택시가 떠나자 여성 후배들은 통쾌해했다. 젊은 여성들은 택시 운전사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눈치를 본다고 했다. 목적지까지 시비 없이 가는 게 가장 안전한 택시 탑승법이라고 그들은 믿고 있었다. 듣기 안타까웠다.

이 시대 대한민국의 여성은 안전한가. 최근 겪은 몇 가지 일은 지금껏 전혀 고민해보지 못했던 화두를 한동안 붙잡게 만들었다. 충격은 금세 다시 이어진다. 지난 14일 서울 지하철 신당역 여자화장실에서 20대 여성 역무원이 스토킹 살인 범죄로 목숨을 잃었다. 자신을 3년여 동안 스토킹하던 남자가 휘두른 흉기에 숨졌다. 성별을 떠나 모두가 아파할 수밖에 없는 비극이다. 하지만 이제 조금은 알 수 있을 듯하다. 남녀가 이 사건을 받아들이는 수위는 결코 같지 않다는 사실을. 애도하는 여성들의 안타까운 마음엔 두려움이 가득 얹혀 있지 않을까. 나에게도 올 수 있는 일로 받아들이는 순간 객체화된 애처로움은 실질적 공포감으로 돌변할 수 있다. “살아서 퇴근하고 싶다.” 신당역 여자화장실 앞 벽면엔 추모의 메시지가 담긴 메모지가 가득하다. 하얀 국화꽃 더미 위로 여성들의 절규가 너덜거리는 듯하다. 적어도 안전만큼은 젠더 갈등의 소재가 될 수 없다. 안전할 권리는 기본권의 영역인 까닭이다. 나의 가족이자 동료인 여성들이 깊은 불안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면 분명 잘못된 상황이다.

신당역 사건 피해자는 형사·사법 시스템에 여러 차례 도움을 호소했다. 국가는 위기 신호를 접수하고도 비극을 막지 못했다. 3년여에 걸친 스토킹 협박 범죄에도 법원은 가해자에 대한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미리 준비한 흉기까지 들이밀며 10대 여학생을 납치하려 한 치한을 구속하지 않고 풀어주는 게 지금 우리의 사법부 수준이다. 이러니 사법부와 수사기관이 여성 공격 범죄를 방조한다는 비난 여론이 불붙을 수밖에 없다. 우리는 허둥지둥 너무 서둘러 달려 왔다. 국민소득 몇 만 달러를 달성해 선진국 반열에 올랐다 자부하지만 곳곳에 구멍이 참 많다. 여전히 상대적 약자인 여성을 보호하는 사회적 시스템은 아직 완벽하지 않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샅샅이 훑어보자. 여성의 불안과 두려움을 낱낱이 찾아 보듬자.


이현우 기자 hoore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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