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복도로가 내 고향이지”… 50년 토박이 마을 회장님 [산복빨래방] EP16.
“산복도로가 내 고향”
산복도로서 보낸 50년
여공에서 마을회장까지
안녕하세요, 산복빨래방입니다. 빨래방이 있는 호천마을 마을 광장은 이른 아침부터 함께 체조하러 모인 어르신들로 북적입니다. 체조가 끝나면 경로당에 오순도순 모여 화투를 치고, 마을 골목도 청소합니다. 부업으로 틈틈이 밤도 깝니다. 이렇게 종일 바쁘다 보니 빨래방에 맡긴 이불을 며칠째 못 가져가는 어머님, 아버님도 많이 계십니다.
호천마을에는 누구나 아는 '회장님'이 있습니다. 바로 조경자(77) 어머님입니다. 공식적인 직함은 아니지만 워낙 오랫동안 부녀회, 녹색회 등 각종 주민단체 회장단을 맡으며 붙은 호칭입니다. 오늘은 50년 동안 이곳에 살며, 산복도로에 대해 모르는 게 없는 조경자 어머님의 인생을 들여다봤습니다.
■6번 이사 끝에 산복도로로
경자 씨는 고향이 없다. 아니, ‘사라졌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1945년 12월 4일, 경자 씨는 옛 김해 녹산면 지사리에 있는 천자도 마을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훗날 이곳은 부산 강서구 지사동에 편입됐다. 한국수자원공사가 아파트를 짓는다며 땅을 수용해서 터도 남아있지 않다. “원래 고향은 김해였는데 부산으로 바뀌었으니, 난 부산 사람이지”라며 경자 씨는 웃어넘겼다.
경자 씨는 6살 때 고모가 사는 옛 김해 가락면 제도리로 이사 갔다. 여느 시골 마을이 그렇듯, 제도리에서는 도통 할만한 게 없었다. 봄에는 씨를 뿌리고, 가을에는 추수하며 보냈다. 24살이 되던 해, 이웃이 중매를 서서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남편은 첫눈에 경자 씨를 마음에 들어 했다. 당시 남편은 군무원이었는데, 부산진구 전포동에서 차량 재생창(정비창)에서 일했다. 그렇게 결혼한 경자 씨는 남편 일터 근처인 남구 문현동에 첫 살림을 차렸다.
“그때는 ‘살고 싶은 곳으로 이사 간다’는 개념 자체가 없었어. 살림이 여의찮으면 셋돈 조금이라도 더 적게 내는 곳으로 옮겨 다녔지. 허가 못 받고 슬레이트로 집을 짓다 보니 무슨 일 생기면 그날로 또 이사 가야 하는 거야. 전포동에도 산 적이 있었는데, 하루는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집 축대가 무너졌거든. 그때 덕명여고에서 이틀 밤 자고, 다른 셋방 찾아 다녔어.”
여섯 차례 이사하던 경자 씨는 딱 50년 전 호천마을에 자리 잡았다. 요즘에야 집을 살 때 은행에서 대출받는 게 당연한 일이지만 당시엔 그렇지 않았다. 경자 씨는 빠듯한 살림 속에서도 남편 월급과 자신이 부업으로 번 돈을 모아 작은 집을 샀다. 지금에야 ‘호천마을’이라는 멋들어진 이름도 있지만 당시에는 그냥 산동네였다. 좁고 낡은 집이었지만 더없이 기쁜 날이었다고 경자 씨는 그 날을 회상한다.
■고무공장 거쳐 ‘마을회장’으로
막내아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 경자 씨는 고무공장에서 일하면 쏠쏠하게 돈을 벌 수 있다는 이야기를 이웃에게 들었다. 1970~1980년대 부산은 삼화고무, 진양고무, 국제고무 등 수많은 고무공장이 쉴 새 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나이키 등 세계적인 브랜드의 신발 생산을 위탁 받았다. 전국 각지에서 일자리를 찾아온 노동자로 부산이 북적였다.
경자 씨가 사는 호천마을은 그중 삼화고무 공장과 가까웠다. 아이들도 이제 끼니 정도는 곧잘 알아서 챙겨 먹었다. 경자 씨는 삼화고무에서 일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가위를 가지고 신발 밑창을 동그랗게 오리는 업무를 맡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밑창을 자르는 기계가 나왔다. 경자 씨는 그 기계를 이용해 밑창을 잘랐다. 더 빨리 신발 밑창을 자를 수 있었지만 그만큼 잘라야 하는 밑창 개수는 늘어났다. 그 후 꼬박 6년 동안 고무공장에서 일한 경자 씨는 남편의 권유로 마흔 나이에 일을 그만뒀다.
일을 그만둔 뒤 마을에서 경자 씨의 제2의 인생이 시작됐다. 사람을 좋아했던 경자 씨는 집에만 있지 않았다. 마을을 누비며 사람을 만나기 시작했다. 마을에 워낙 애착이 있던 터라 부녀회, 녹색회 등 주민단체에 들어가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누가 돈을 주는 것도 아니었지만, 동년배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게 그렇게 즐거웠다. 자연스럽게 주변의 권유로 회장단도 맡게 됐다. 이러한 모임을 그만둔 뒤에도, 많은 사람이 아직 경자 씨를 ‘회장님’이라고 부른다.
경자 씨 표현을 빌리자면 그녀가 ‘날개를 펴기 시작’한 건 약 9년 전 마을에 문화센터가 들어오면서다. 문화센터가 만들어진 뒤 인근 복지관에서 여러 프로그램을 만들었는데, 회원을 모으고 운영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어르신들과 큰 연고가 없는 복지관 입장에선 당연한 일이었다. 복지관은 경자 씨의 ‘명성’을 듣고는 직접 찾아왔다. 프로그램에 참여할 회원이 필요하다며 도움을 요청했다.
“처음에는 안 하려고 했지. 사실 이런 자리는 아무도 안 하려고 해. 원래 없던 모임을 새로 만들어야 하는 게 어디 쉬운가. 그런데 주변에서 ‘너 말고는 할 사람이 없다’고 추천하는데, 너무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더라고. 그래서 했어. ‘그래, 주민들이 모여서 뭐라도 하면 우리 마을이 더 잘 되겠지’라는 마음에 뛰어다녔지. 처음에는 회원도 잘 안 모이고 여간 힘든 게 아니었어.”
■제2의 고향, 호천마을
경자 씨가 밤낮 가리지 않고 뛰어다닌 덕분일까. 문화센터는 점차 요가, 비누 만들기, 캘리그라피 등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채워졌다.호천마을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열리는 ‘100세 건강 체조’도 경자 씨 작품이다. 경자 씨는 도시재생 관련 사업 공모전에 체조 프로그램을 신청했다. 주민들이 마을 광장에 모여, 체조 선생님 율동을 따라 다 같이 체조하는 프로그램이다. 계단을 오르내리는 게 일상인 호천마을 주민에게 다리 건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사실 우리 마을이 불편한 점이 많아. 큰 마트 하나 없고, 시장이 주변에 있는 것도 아니고. 더군다나 계단이 많아서 전부 오르막길, 내리막길이지. 그래도 ‘이건 운동이다’ ‘내 몸에 좋다’라고 생각하면 그 길을 다니는 것마저 즐겁게 느껴져. 그리고 집이 오밀조밀 있어서 인심이 참 좋고 산동네라 공기도 좋아. 큰아들이 ‘불편한데 아파트에서 같이 사시죠’라고 하는데 여기서 50년 세월 살다 보니 태어난 고향보다 더 정이 들어서 못 나가겠어. 여기가 제2의 고향이야.”
계단이 많은 ‘불편한 마을’에 사는 경자 씨. 하지만 그녀는 누구보다 마을을 열렬히 사랑한다. “그저 호천마을에서 하는 모든 게 잘 됐으면 좋겠어. 그래야 죽을 때까지 이 동네에서 즐겁게 살지.” 경자 씨의 답변에는 50년간 삶을 지내온 마을에 대한 애착이 고스란히 스며있었다.
※본 취재는 부산광역시 지역신문발전지원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김준용 기자 jundragon@busan.com , 이상배 기자 sangbae@busan.com , 이재화 jhlee@busan.com , 김보경 harufor@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