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 하나하나 정성 들여 쌓은 바닷가 성에 오르며 파도가 실어 온 감성에 젖었다
거제 성(城) 나들이…매미성, 구조라진성, 지세포진성
시간 쌓인 성곽 걷고 바다 풍경까지 함께 즐길 수 있어
초가을 바람이 제법 선선하다. 이렇게 계절이 바뀌면 지나간 계절에 아쉬움이 남는다. 지난여름 실컷 즐기지 못했던 바다가 못내 아쉽다. 아직 한낮엔 여름 색을 띤 바다를 눈과 사진에 담을 수 있는 곳이 있다. 시간이 쌓이고 파도가 쌓이는, 경남 거제시의 성(城) 세 곳을 찾았다.
■매미성, 한 사람의 열정이 전국 명소 만들다
거가대교가 놓이면서 부산에서 거제는 가까운 곳이 됐다. 거제시 장목면 복항마을의 매미성은 거가대교에서 지척이다. 매미성을 향해 걸어가는 길, 이곳이 ‘핫플’임을 증명하듯 카페, 식당, 디저트 가게, 사진관 등이 줄줄이 이어진다. 불과 몇 년 사이 달라진 풍경이다.
매미성은 역사 속 옛 성이 아니다. 매미성 부지는 조선소를 다니던 백순삼 씨가 은퇴 후 전원생활을 꿈꾸며 가꾸던 밭이었다. 그러나 2003년 태풍 ‘매미’ 때 밭이 쓸려 내려갔고, 그때부터 그는 태풍 피해를 막을 생각으로 홀로 성을 쌓기 시작했다. 매미성 이름은 태풍 ‘매미’에서 딴 이름이다.
마을 안길을 따라 바닷가로 내려가다 굽이진 길을 돌자, 저 멀리 바닷가에 선 성이 보인다. 백 씨가 설계도 한 장 없이 흙과 돌, 시멘트로 지은 성이라는데 유럽 중세 시대가 떠오를 만큼 이국적이고 아름답다. 성 뒤편으로 아스라이 거가대교도 보인다.
매미성은 규모는 작지만 아기자기한 볼거리를 곳곳에 숨겨 놓고 있다. 바위 절벽을 깎아서 낸 계단을 따라 오르고 겨우 한 사람이 지날 만한 좁은 통로를 따라 발걸음을 옮겨 보는 것 자체도 재밋거리다. 창처럼 뚫려 있는 곳에는 저마다 다른 풍경이 걸린다. 찰싹찰싹 몽돌 해변에 부서지는 파도, 바다에 떠 있는 작은 섬 이수도, 바다를 가로지르는 거가대교, 푸른 소나무와 하늘…. 바다와 섬을 한 컷에 담을 수 있는 통로는 ‘인생사진’ 명소로 꼽힌다. 주말에는 줄을 서서 찍을 정도다. 하지만 찬찬히 성을 돌아보니 어디에서 찍어도 그림 같은 사진 배경이 된다. 몽돌이 들려주는 ‘자그락자그락’ 배경음악도 즐겁다.
매미성은 현재진행형이다. 성을 찾은 날도 백 씨는 한쪽에서 성벽 쌓기에 여념이 없었다. ‘작업 중이니 말을 걸지 말아 달라’는 안내판이 그의 집념을 말해 준다. 한 사람의 힘과 열정이 이룬 값진 성이다.
■구조라진성, 샛바람소리길 지나 조선시대로 가다
널찍한 구조라유람선터미널에 주차하고 일운면 구조라진성으로 향했다. 터미널 건물 앞 건널목을 건너 마을 안길로 들어가면 성으로 가는 길을 찾기 쉽다. 방향을 알려주는 표지판이 곳곳에 잘 설치돼 있고, 바닥에도 방향이 그려져 있다. 가는 길엔 마을을 지키는 당산목도 만날 수 있다.
‘샛바람소리길은 뎅박동에서 구조라성 망루가 있었던 언더바꿈으로 가는 오솔길 아입니까. 옛날 밭둑 구분도 하고, 샛바람을 피할라꼬 심은, 머라 캐야 하노. 우찌 보모 방품림이라 캐야 하나. (…)샛바람에 한 매친 알라 귀신들이 울어대는거 그치 등골이 오싹해가지꼬 식겁했다 아입니까.’
‘보이소’라는 제목의 안내문 내용이다. 샛바람 소리길은 구조라성 망루가 있는 성벽으로 이어지는 짧은 오솔길이다. 이 길은 ‘SNS 인증사진’으로도 유명하다. 길에 들어서자마자 키 큰 신우대가 꽉 차 있다. 좁은 길을 향해 대나무가 기울어져 있어 깊고 어두운 터널을 걷는 듯하다. ‘쏴~’ 바람이 불자 대숲이 흔들리고 빛도 흔들린다. 눈앞이 밝아졌다가 어두워졌다가 신비로운 분위기를 만든다. 안내문에서 ‘알라 귀신’들이 우는 것 같다고 표현한 대숲 바람 소리는 거제 바다 파도 소리처럼 시원하다.
샛바람소리길을 지나면 ‘언더바꿈’과 전망대가 나온다. 바다가 보이는 곳으로 올라가자마자 감탄이 절로 나온다. 어디에 내놓아도 돋보일 예쁜 바다색이다. 언덕 끝에 선 나무 한 그루와 벤치 하나가 멋진 풍경을 그려낸다.
구조라진성은 조선시대 낙동강 서쪽 지역인 경상우도 소속 수군 진성으로, 왜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종 21년(1490년)에 쌓았다. 둘레 860m, 너비 4.4m, 높이 4m 정도의 성벽이 남아 있다. ‘수군 진성’이란 조선시대에 적으로부터 물자를 보호하려고 포구를 중심으로 쌓은 성이다.
성벽을 따라 하늘에 더 가까이 올라섰다. 구조라항과 바다가 한눈에 펼쳐진다. 시간이 층층이 쌓인 성벽 위에 잠깐 앉아 자연의 풍경과 소리와 향기를 즐겼다. 내려오는 길은 반대쪽으로 잡았다. 아래쪽과 위쪽 길이 있어 매트가 깔린 위쪽을 선택했는데 중간쯤부터 풀이 길게 자라 길이 사라졌다. 아래쪽은 벌초 때 정리한 듯 정돈돼 있다. 내려가는 길에는 마을에 들어오는 액과 질병을 막는 역할을 했던 서낭당이 있다.
구조라리의 바닷가 마을에는 우체국 건물을 리모델링한 ‘바람곶우체국’이 있다. 여행자를 위한 플랫폼으로, 먹고 쉬고 놀 수 있는 이색공간이다. 가족, 친구, 혹은 나에게 보내는 느린 손엽서(6개월 뒤에 도착)와 사랑을 약속하는 사랑의 자물쇠가 눈길을 끈다. 바로 옆 ‘외도널서리’도 핫한 카페다. 외도 보타니아 설립자가 지은 유리 온실 콘셉트 카페로 바다 뷰가 큰 매력이다.
■지세포진성, 화려한 꽃은 지고 없지만 아름답다
일운면 지세포진성은 왜적의 침입에 대비해 성종 21년(1490)에 완공한 성이다. 임진왜란 때 적을 방어하다가 함락됐던 아픈 역사가 있다. 성은 동쪽 끝 선창마을에서 서쪽을 향해 쌓았으며, 현재 서벽 일부가 복원돼 있다. 성의 외벽은 자연석으로 쌓고 내벽은 돌로 쌓은 후 내벽과 외벽 사이를 크고 작은 돌로 채웠다.
성으로 가는 길은 좁다란 마을 길이다. 표지판이 잘 돼 있어 찾아가는 길이 어렵지 않다. 사실 지세포진성이 이름을 날리는 때는 초여름이다.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성 안쪽 비탈밭에 라벤더를 심었기 때문이다. 성 안쪽 가득 라벤더 보랏빛 물결이 푸른 바다 물결과 어우러지면 장관이다. 지금은 꽃밭을 덮은 검은 비닐만 쓸쓸하게 남아 있다. 하지만 시원하게 펼쳐지는 바다 풍경은 여전히 아름답다.
성벽을 따라 차근차근 걸어 올라 꼭대기쯤에 이르면 육지를 파고든 바다와 마을, 항구가 시원하게 내려다보인다. 성 안쪽으로 내려가면 가볍게 걸으면서 바다 풍경도 만끽할 수 있다.
마을로 돌아가는 길의 작은 꽃 무리가 라벤더에 대한 미련을 조금이나마 떨치게 한다. 어린아이 키만 한 ‘배초향’이다. 흔히 ‘방아’로 불리는 토종 허브다. 잎은 작은 깻잎처럼 생겼고 꽃대에 연보랏빛 꽃이 다닥다닥 피어 있다. 방아잎은 많이 봤지만 꽃은 처음이라 오래 눈길이 갔다.
“지금은 볼 게 너무 없지예, 다른 계절에도 볼 게 있으면 좋을 건데예.” 꽃밭을 가꾸고 있는 이들이 오히려 미안해했다. 5~6월 여행 리스트에 지세포진성을 꼭 올려야지 마음먹으면서도 다른 계절의 볼거리에 대한 아쉬움은 남는다.
김동주 기자 nicedj@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