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좁고 비탈진 골목에 몰린 인파, 옴짝달싹 못 하자 ‘집단 패닉’
[이태원 참사] 인명피해 왜 커졌나?
‘이태원 참사’가 대규모 인명피해로 이어진 데에는 가파르고 비좁은 비탈길 골목에 갑자기 엄청난 인원이 몰린 것이 주요 원인으로 지목된다.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된 사람들이 ‘집단 패닉’에 빠지면서 피해는 더욱 커졌다.
참사가 발생한 장소는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 해밀톤호텔 뒤편인 세계음식거리에서 이태원역 1번 출구가 있는 대로로 내려오는 좁은 골목길이다. 해밀톤호텔 옆 좁은 내리막길은 너비 4m, 길이 45m 안팎이다. 넓이로 계산하면 55평 남짓에 불과하다. 기껏해야 성인 5~6명이 옆으로 나란히 지나갈 수 있을 정도다. 게다가 술집, 클럽 등에서 야외 테이블을 내놓으면서 이동할 수 있는 공간은 더욱 좁아졌다.
폭 4m 길이 45m 가파른 골목
한쪽은 해밀톤호텔 외벽에 막혀
전단지로 미끄러운 바닥도 원인
순식간에 대열 무너지며 참변
공황 상태 빠진 군중 우왕좌왕
뒤엉킨 인파에 구조 작업 난항
이 골목은 이태원의 번화가와 대로변을 잇는다. 세계음식거리가 있는 위쪽에서 내려오는 인파와 이태원역에서 나와 아래에서 올라가려는 인파의 동선이 겹쳐 사람이 밀집할 수밖에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이 길의 한쪽은 해밀톤호텔의 외벽이어서 사람들이 피할 틈이 없었다.
참사가 벌어지기 전 한때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우측통행을 하기도 했으나 어느 순간 이 골목이 수용할 수 있는 이상의 사람이 몰리면서 혼란이 빚어졌다. 인파에 휩쓸려 옴짝달싹하지 못하거나,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골목길을 오르내렸다는 경험담이 많이 나오는 것도 그 때문이다.
현장에 있었으나 참변을 피한 생존자들은 ‘오지도 가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갑자기 누군가 넘어지면서 대열이 무너지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대부분은 사고가 일어난 시점이나 결정적 계기를 특정하기보다는 그저 “순식간이었다”고 표현했다.
당시 현장에 있던 일부 사람들은 “뒤로 뒤로”라고 외쳤는데 일부가 “밀어 밀어”로 잘못 듣고 앞 사람들을 밀었다고 전하기도 했다. 유명인을 보기 위해 인파가 한꺼번에 몰리면서 사태가 심각해졌다는 증언 등 검증되지 않은 다양한 목격담이 쏟아지는데, 이에 대해서는 경찰이 CCTV 등을 토대로 수사에 나섰다.
인파가 뒤엉킨 탓에 당시 출동한 소방과 경찰도 구조에 애를 먹었다. 또 출동한 소방대원과 경찰이 아래에 깔린 피해자를 빼내려고 했으나, 사람이 뒤엉키면서 꽉 끼인 탓에 구조가 쉽지 않았다.
소방서와 사고현장은 100m 거리로 멀지 않았지만, 구급대가 인파를 뚫는 데 애를 먹어 평소보다 시간이 오래 걸린 것으로 전해졌다. 또 심정지, 호흡곤란 환자가 300명 가까이 나오면서 1 대 1로 해야 하는 심폐소생술(CPR)을 하는 구급 대원도 턱없이 부족해 전문적이지 않은 시민들까지 가세해야 했다. 참사 뒤 귀가하려는 시민들의 차량이 이태원로에 집중되면서 환자를 태운 구급차가 병원으로 가는 일도 쉽지 않았다는 게 현장 목격자들의 증언이다.
전문가들은 군중의 공황 상태도 피해 확산의 원인이라고 짚었다. 예상치 못한 엄청난 인파, 좁고 경사진 골목, 술과 전단지 등으로 미끄러운 바닥 등 불안전한 환경적 요소로 인해 사람들이 한꺼번에 패닉 상태에 빠지게 됐다는 것이다.
동의대 소방방재행정학과 류상일 교수는 “본인도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면 갑자기 패닉 상태에 빠지고 이성적인 행동을 하기가 어려워진다”며 “특히나 압사 사고는 예견하기가 쉽지 않아 우왕좌왕하고 극단적으로 행동하려 하는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동양대 건축소방안전학과 유우준 교수는 “집단 패닉에 빠진 군중은 피난로가 두 방향이어도 남들이 달리는 방향으로만 가게 된다”며 “이번 압사 사고는 예측의 영역을 벗어났다”고 전했다.
안준영 기자 jyoung@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