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의 시선] 지도자의 무지와 그 죄
“모르면서 아는 것처럼 나서지 말라”… 옛 가르침 되새길 때
옛적에는 무당이 어떤 방식으로든 아픈 사람을 치료해 주는 역할도 했다. 하지만 의료 지식은커녕 굿 하나도 제대로 못하는 위인이라 엉뚱한 조치로 목숨을 잃게 하는 경우도 많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했다. 제 구실도 못하면서 스스로 재주가 많다고 착각해 큰일을 벌이다 낭패를 보는 사람을 경계하는 말이다.
■당백전의 계책
조선 말기 나라 살림은 몹시도 궁핍했다. 왕실의 위엄을 되찾고자 했던 흥선대원군과 고종의 고민이 컸다. 특히 무너진 경복궁을 중건하는 일이 화급한데 돈이 없었다. 궁여지책으로 나온 게 그 유명한 당백전(當百錢)이었다. 고종 3년(1866년) 12월부터 2년 가까이 사용됐는데, 동전의 겉에는 ‘호대당백’(戶大當百) 네 글자를 새겼다. ‘호조에서 만든 일반 동전의 100배에 해당하는 큰돈’이라는 의미다. 하지만 말이 100배이지 구리 함량 등 실제 가치는 6배 정도에 불과했다. 한마디로 악화(惡貨)였다.
당백전 아이디어는 당시 좌의정 김병학이 냈다. 그는 당백전이 국가 재정을 늘리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며 고종에게 진달했다. 반대가 없었던 건 아니다. 판중추부사 조두순 같은 이는 당백전이 노력은 적게 들면서 이득은 매우 크기 때문에 악용 등 폐해가 우려된다며 임금의 재고를 요청했다. 하지만 우의정 유후조를 비롯해 정부의 주류들은 “경제가 궁핍한 형편에 훌륭한 계책”이라며 시행을 밀어붙였다.
이후의 일은 익히 아는 바다. 화폐 가치가 날이 갈수록 떨어지고 물가는 폭등했다. 민생은 파탄에 이르고 경제는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망가졌다. 결국 조선을 극복하고자 세운 대한제국이건만 나라 지킬 무기 하나 제대로 마련할 재정이 안 돼 마침내 국권을 잃는 몰락의 길을 걷게 됐다.
■레고랜드발 공포
레고랜드 사태가 나라를 흔들고 있다. 전후 과정을 간추리면 이렇다.
강원도 레고랜드의 중도개발공사(GJC)가 테파마크 조성 계획을 세운 뒤 자금 조달을 위해 2050억 원의 어음을 발행했다. 2020년의 일이다. 이 어음에 대해 강원도가 보증을 섰고, BNK투자증권의 주관으로 증권사 등에 팔렸다. 해당 어음의 만기일은 올해 9월 29일. GJC는 이를 상환할 능력이 없었다. 그래도 어음을 샀던 증권사 등은 믿는 구석이 있었다. 강원도의 보증이었다. 그런데 날벼락이 떨어졌다. 김진태 강원도지사가 “법원에 GJC의 회생신청을 하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회생신청은, 간단히 말해, 회사를 처분해 그 돈으로 빚을 갚겠다는 의미다. 어음을 산 증권사들은 깜짝 놀랐다. 강원도가 빚을 떠안을 생각이 없음을 공식적으로 밝힌 것으로 받아들였다. 설사 회생절차에 따라 CJC를 처분한다 해도 하세월이요, 제값에 팔릴지도 의문이었다. 투자자에겐 말 그대로 공포였다.
여파는 CJC 어음에서 그치지 않았다. 김 지사의 발언은 국가나 지자체가 보증 선 채권 등 금융상품은 안전하다는 기존 인식을 완전히 무너뜨렸다. 공포는 국내 금융시장 전반으로 퍼져나갔다. 회사채 시장이 얼어붙었고 기업들은 자금조달 길이 막혔다. 한국전력, 한국도로공사 같은 우량 공기업들의 회사채도 팔리지 않았다. 한 조사에 따르면 지난달 국내 채권 거래금액이 전달보다 100조 원 가까이 줄어들었다. 채권 금리도 폭등해 2009년 금융위기 이후 최고를 찍었다. 대규모 건설·부동산 사업을 위한 프로젝트파이낸싱(PF) 시장도 꽉 막혔다. 지역 중소 건설사와 증권사의 부도설이 파다하게 퍼졌다.
■“좀 미안하다”
놀란 정부가 비상거시경제금융회의까지 열어 진화에 나섰다. 50조 원이 넘는 유동성 공급 계획을 발표했다. 하지만 투자자들의 불안은 쉽게 가라앉지 않고 있다. 시장에서는 또 다른 채무불이행 사태가 촉발될 위험이 있다며 ‘제2의 레고랜드’가 어디가 될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일각에서는 이 사태가 금융시장만이 아니라 실물경제까지 흔들 수 있는 상황이라며, 정부의 조치가 너무 늦었다는 비관적인 목소리가 나온다.
이처럼 경제에 엄청난 혼란을 초래한 김 지사이건만, 그는 “채무불이행을 선언한 적이 없다”며 억울하다는 태도를 고수하고 있다. “강원도는 보증 채무를 반드시 이행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하지만 시장은 김 지사의 말을 신뢰하지 못하고 패닉 상태에 빠졌다.
이에 대해 김 지사는 지금껏 제대로 된 사과를 하지 않았다. “본의 아니게, 불필요한 혼란과 오해를 초래하게 해서 매우 유감”이라거나, “좀 미안하다. 어찌 됐든 전혀 본의가 아닌데도, 이런 식으로 흘러오니까”라고 언급한 게 전부다. 하지만 김 지사의 ‘회생신청 발표’가 쓰지 않아도 될 어마어마한 나랏돈을 쓰게 만들고 국가 경제를 혼돈에 빠뜨린 건 분명한 사실이다. 자신의 말 한마디가 이런 결과를 일으킬 줄은 몰랐을 수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현재 위기의 책임에서 김 지사가 자유로울 수는 없다.
■영국의 수모
비슷한 사례가 영국에서도 있었다. 올 9월 초 총리에 취임한 리즈 트러스가 상위 1% 고소득자의 소득세율 45%를 철폐하는 등 450억 파운드(약 73조 원) 규모의 감세안을 발표했다. 이는 1972년 예산안 이후 가장 큰 규모의 감세였다. ‘제2의 마거릿 대처’를 꿈꿨던 성장우선주의자 트러스는 평소 “낮은 세금, 높은 성장”을 추구했다. 하지만 시기가 좋지 않았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영국은 현재 물가와 금리가 폭등하고 중앙정부의 채무도 감당하기 힘든 수준이다. 이런 판에 세금을 줄이면 정부는 빚을 내 나라 곳간을 채울 수밖에 없다. 이미 영국 중앙은행인 영란은행이 물가를 잡기 위해 국채 매각을 예고한 상태였는데 또다시 국채를 대규모로 발행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영국 국채가 시장에 대규모로 풀릴 것이라는 전망에 채권값은 급락했고, 이 때문에 자금난에 봉착한 영국 연기금은 해외 금융자산을 대거 팔았다. 충격에 세계 금융시장이 요동쳤다. 영란은행이 다급하게 국채 매각 계획을 유보하는 등 진화에 나섰으나, 이미 파운드화 가치는 폭락했고 영국 연기금은 무려 1500억 파운드(약 244조 원)의 손해를 입은 뒤였다. 국가 경제를 위기로 몰아 넣은 감세안은 결국 철회됐다. 트러스는 지난달 25일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알아야 면장
평소 “너 자신을 알라”고 외친 소크라테스에게 어떤 이가 “그러는 당신은 자신을 잘 아느냐”고 물었다. 소크라테스는 말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모른다는 걸 나는 안다.” 비슷한 가르침은 〈논어〉에도 있다.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진정으로 아는 것이다.” 불가(佛家)에선 “모르는 줄 아는 아는 것이 곧 견성”이라고 가르친다. 모르면서 마치 아는 것처럼 나서지 말라는 이야기다.
깊은 지식도, 정확한 판단력도, 주변에 지혜를 구할 분별력조차 없으면서 무턱대고 내뱉는 말의 후과는 클 수밖에 없다. 특히 그것이 대단한 권력을 가진 지도자의 문제라면 피해는 특정 개인에 한정되지 않는다. 심하면 나라를 말아먹을 수도 있다. 그래서 지도자의 무지는 그 자체로 죄악이다. 모름지기 알아야 면장을 한다고 했다.
임광명 논설위원 kmyim@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