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로365] 유가족과 생존자를 돌보는 사회
변정희 ㈔여성인권지원센터 ‘살림’ 상임대표
“‘어느 날 나는 해가 지는 걸 마흔네 번이나 보았어. 너무 슬플 때는 해 지는 풍경을 좋아하게 되고 말아.’ 나는 물었다. ‘마흔네 번이나 본 날, 그럼 너는 그만큼 몹시 슬펐다는 거구나?’ 어린 왕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의 한 대목이 아침 라디오에서 흘러나왔다. 할 수만 있다면 의자를 조금 움직여 하루에도 몇 번씩 해 지는 풍경을 바라보는 일이, 그 어떤 말보다도 위로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칼럼의 지면이 이토록 막막했던 적이 없다. 글 한 줄도 쓰기가 어렵고 쏟아지는 말들에 더 말을 보태는 것조차 죄스럽다. 사람이 사람의 무게로 압사당하는 비극이 모든 사람들 앞에 지옥도로 펼쳐졌다. 마음의 무게가 일상을 짓누르고 숨 쉬는 것조차 힘들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이 슬픔으로도 사랑하는 이를 잃은 유가족의 슬픔을 다 헤아릴 수 없고, 떠난 이들의 삶을 대신할 수 없다는 걸 안다. 생존자들이 겪고 있을 압도적인 트라우마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이 지면을 참사 희생자와 유가족 그리고 생존자들에게 내주고 싶지만 지금 이들에게 당장의 고통과 슬픔을 설명할 언어가 있을까. 아직은 그 어떤 말로도 충분치 못할 것이다.
안전에 대한 믿음 상실 집단 트라우마
정부 당국자 책임 회피, 본질 흐리는 말
재난마저 정쟁화 하고 애도 공허하게 해
112 신고 빗발 막을 수 있었던 인재
철저한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 따라야
유가족·생존자 치유 공공이 나서야
성급하게 서사를 완결 짓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있다. 납득이 가지 않는, 해소되지 않는 슬픔과 분노 앞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원인을 찾아 일어난 비극과의 인과관계를 완성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나 오카 마리의 지적처럼 그것은 ‘사건’의 외부에 살고 있는 사람들, 말하자면 이 세계의 일상을 그저 안심하며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서사는 아닌지 질문해 볼 필요가 있다. 이 참혹한 재난을 설명하고, 고통을 해소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사건’의 내부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중심에 두어야 한다. 이를테면 참사에 대한 원인 규명은 반드시 필요한 과정인데, 그것은 이 세계가 안전하다는 믿음이 유가족과 생존자에게 다시 주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재난조차도 또다시 정치적 분열의 도구가 되어 버리거나, 재난과 죽음 앞에서조차 희생자와 유가족을 모욕하고 조롱하는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트라우마는 이 세상은 안전하고 자기 자신은 가치 있으며 세계의 질서는 의미가 있다는 기본적인 전제들을 파괴한다. 개인적 수준만으로는 이러한 상처의 회복이 어렵다. 큰 재난과 사회적 참사의 경우에는 더 말할 것도 없다. 공동체가 책임을 분담하고, 상처를 치료하기 위한 행동을 취해야 한다. 공동체의 구성원 중 누구라도 참사의 희생자가, 희생자의 유가족이, 그리고 생존자가 될 수 있다. 오랜만에 찾아온 해방의 기분을 만끽하고 싶은 사람들, 많은 사람들 틈에서 출퇴근하는 사람들, 여느 서울 시내가 그렇듯이 대도시의 누구라도 그 골목길을 지나가는 사람일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 참사를 둘러싸고 이 공동체 속의 여러 공공의 주체들이 보여 준 모습은 어떠한가.
정부는 국가 애도 기간을 선포하였지만 제대로 된 사과보다 책임을 회피하거나 ‘사고’나 ‘사망자’와 같은 말로 본질을 흐리거나 축소시키려는 모습을 보였다. 그럴수록 국가의 애도는 점점 더 공허해지기만 했다. 대규모의 인파에도 공공(公共)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지자체의 대응도 안이했다. 언론 역시 노마스크 핼러윈 축제에 기대감을 실어 주었지만 대규모 인파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안전 문제를 진지하게 논의한 사전 보도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거기에 참사 4시간 전부터 11차례나 반복되었던 시민들의 112 신고에도 단 4건만 출동이 이루어졌으며 인파 통제 요청에 경찰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막을 수 있었던 인재였다는 것이 더욱 더 분명해지면서 참담함과 분노는 더욱 크게 일어났다. 경찰은 강도 높은 감찰과 수사를 철저하게 진행하겠다고 밝혔지만 112 신고 체계, 경찰 행정과 조직 특성을 고려할 때 이는 명백하게 수뇌부의 책임이 아닐 수 없다.
비극적인 참사 앞에 우리 사회 전체가 공통적인 외상을 겪고 있는 중이지만, 더디더라도 조금씩 회복되어 일상에 단단히 발을 내딛고 살아갈 것이다. 그러나 유가족과 생존자들이 스스로를 회복하고 그들 앞에 무너진 가치와 질서를 재건하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 참사 희생자의 유가족과 지인들, 그리고 참사 생존자들에게 충분한 애도의 공간을 내어 주고 회복의 시간을 보장해야 한다. 희생자와 유가족, 생존자들에게 쏟아지는 비난이나 모욕에는 사회 구성원 전체가 단호하게 대처해야 한다. 무엇보다 유가족과 생존자들을 돌보는 공동체로서, 행정주체들의 책임 있는 태도야말로 회복의 출발점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다시 한번 참사 희생자의 명복을 빌며, 유가족과 생존자들에게 위로를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