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희와 함께 읽는 우리 시대 문화풍경] 공감하는 사회를 위한 투쟁
부산대 대학원 예술·문화와 영상매체협동과정 강사
존 콜리어의 ‘레이디 고다이바’는 벌거벗은 몸으로 말을 탄 고다이바 부인을 그린 작품이다. 긴 머리로 몸을 가리고 고개 숙인 모습에서 수치심을 감내하는 마음자리를 읽을 수 있다. 알몸은 결코 굴욕적이거나 관능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기품이 넘친다. 이 그림의 배경에는 11세기 머시아 왕국에서 자행된 수탈의 서사가 자리하고 있다. 영주가 가혹한 세금을 부과하자 부인 고다이바는 세금을 감면해달라 요청했다. 그녀는 백성을 사랑한다면 알몸으로 말을 타고 마을을 한 바퀴 돌아 진심을 증명하라는 영주의 조롱 섞인 제의를 실천했다. 마을 사람들은 누구랄 것 없이 창밖을 보지 않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재단사 톰만이 이를 어기고 고다이바를 훔쳐보았다. 관음증을 일컫는 용어 ‘피핑 톰’(Peeping Tom)의 유래다.
현대사회에서 엿보는 행위는 일상화되었다. 특히 이를 과도하게 부추기거나 진실과 허위의 경계를 넘나들도록 만드는 미디어가 문제다. 타인의 고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면서 고통과 슬픔을 배려하거나 존중하지 않는다. 고통을 상품화하는 저널리즘의 관행은 전쟁의 비극이나 기아의 고통마저 손쉬운 볼거리로 전락시킨다. 고통의 개별성과 내력에는 관심이 없다. 미디어만이 아니다. 휴대폰 고성능 카메라와 SNS 덕분에 사회 곳곳의 고통은 즉각적으로 공유되고 또 광범위하게 확산된다. 매 순간 홍수처럼 쏟아지는 타인의 고통에 감각이 무뎌질 수밖에 없다.
카메라의 발명은 혁명적인 변화였다. 찰칵! 셔터만 누르면 눈앞의 풍경과 현장을 있는 그대로 담을 수 있었다. 사진은 태생부터 사실적이라는 공인을 받은 매체였다. 사진을 처음으로 비판 대상으로 삼은 이는 수전 손택이다. 구도 안에 피사체를 배치함으로써 메시지를 재구성하거나 조작할 수 있음을 예리하게 간파한 것이다. 특히 고통받는 타자의 육체를 보려는 욕망을 관음증으로 간주했다. 자신의 고통이 아닌 까닭에 고통을 소비한다는 점에서 카메라를 ‘고통받는 사람들을 향해 쏘는 총’에 비유했다. 그저 값싼 연민과 동정만이 일회적으로 소비될 뿐이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고 탐닉한다면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관음증 환자라는 수전 손택이 진단이 무겁게 다가서는 어제오늘이다. 미디어 정치에 편승해 문제의 본질을 놓치거나 외면하기 일쑤다. 고다이바를 훔쳐본 톰은 앞을 보지 못하는 징벌을 받았지만,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는 우리는 점점 심장 없는 괴물이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타인의 고통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 비극적 상황에 환멸하고 전시된 타인의 고통에 연민을 느끼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타인의 고통은 언제든지 자신의 고통이 될 수 있다. 타인의 고통을 자기화하면서 이를 걷어내려는 사회적 공감과 실천이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