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명섭의 플러그인] 또다시 맞이하는 우울한 연말
논설위원
이태원 참사로 올 연말 분위기 숙연
기대했던 각종 행사도 줄줄이 취소
난방용 에너지·생활 물가도 급등
서민들 유달리 더 추운 겨울 될 듯
코로나마저 12월 재유행 경고등
일상 회복 위한 기회도 마련해야
11월로 들어서면서 아침 기온이 뚝 떨어졌다. 또 한 해의 끄트머리가 다가왔음을 느낀다. 매년 이맘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언제 이렇게 또 한 해가 지나갔는가 싶다.
연말이면 늘 그렇듯 설렘과 아쉬움이 교차하지만, 올해는 특히 그 지긋지긋한 코로나19 사슬에서 벗어나 예전과 같은 연말연시를 보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높았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도 그랬다. 코로나가 본격적으로 퍼진 2020년 이후 연말연시 분위기를 마음껏 즐기지 못했던 까닭이다.
그런데 올해도 이런 기대는 이뤄지지 못할 듯하다. 지난달 말 발생한 이태원 참사로 인해 예전과 같은 흥겨운 연말연시는 어렵게 됐다. 많은 젊은 목숨이 희생된 마당에 흥청망청한 분위기는 맞지 않는다.
이미 올 연말 회식이나 모임을 자제하는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수개월 전부터 연말 대목을 준비해 온 유통, 호텔, 외식업계도 대형 행사를 전면 중단하고 있다. 11월을 쇼핑 성수기로 만든 블랙프라이데이, 코리아세일페스타, 광군제 등 대규모 온오프라인 행사도 연기 또는 축소됐다. 11일 ‘빼빼로데이’ 역시 마찬가지다. 또 수능 시험을 보는 수험생을 위한 응원 행사나 각종 할인 이벤트도 평소보다 크게 줄거나 아예 취소됐다.
가라앉은 분위기는 4년마다 열리는 지구촌 최대의 축제인 월드컵축구 열기마저 잠재우고 있다. 2022년 카타르 월드컵 개막이 이달 20일로 다가왔지만, 예전처럼 우리 대표팀을 위한 단체 응원은 없다. 대한축구협회가 4일 거리 응원 취소를 이미 결정했고, 2018년, 2014년 월드컵 때 아시아드주경기장 등을 개방해 시민들의 단체 응원을 주관했던 부산시 역시 올해는 계획이 없다.
일말의 아쉬움이 없지는 않겠으나, 국가적인 큰 슬픔을 겪은 뒤임을 감안하면 어찌할 도리가 없다. 긴 코로나19의 터널에서 벗어나 이제야 정상적인 연말연시를 보낼 수 있기를 기대한 많은 국민의 실망감은 마음속으로 삭혀야 할 듯싶다.
이태원 참사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올해 연말 분위기를 가라앉게 만드는 요소는 한둘이 아니다. 올해 초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해 촉발된 전쟁은 아직도 진행 중이고, 북한의 군사적 도발로 인한 한반도의 긴장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이런 가운데 서민들의 삶을 움츠러들게 하는 물가 급등, 특히 겨울철을 맞아 에너지 가격의 상승은 서민들의 방바닥을 벌써 싸늘하게 식힌다. 각 가정의 난방·온수 사용량을 계량기로 검침해 부과하는 열요금은 올해에만 벌써 40% 가까이 급등했다. 올해 들어 4월, 7월, 10월에 걸쳐 연속 세 차례나 올랐다. 열요금이 오른 것은 2019년 8월 이후 3년 만인데, 한 해에 또 이렇게 세 차례나 상승한 것도 올해가 처음이라고 한다. 도시가스가 공급되지 않는 농어촌 등 주택에서 실내 난방용으로 사용하는 등유 가격도 리터 당 지난해보다 무려 50% 가까이 올랐다.
에너지 가격 급등이 우리나라만의 상황은 아니라고 해도, 서민들로서는 올겨울 어지간히 춥지 않은 다음에야 보일러를 선뜻 가동하기도 쉽지 않다. 추위에 더 서러운 게 서민들임을 감안하면 올해는 서민들에게 유달리 가혹한 겨울이 되지 않을까 걱정된다. 여기다 다른 생활 물가마저 치솟은 상황이니 이래저래 올해 연말이 더 춥고 쓸쓸하게 느껴진다.
게다가 이젠 거의 끝나는가 싶었던 코로나 상황에도 다시 경고등이 켜졌다. 방역 당국에 따르면 최근 주간 일평균 확진자는 4만 명대로 한 달 새 2배 이상 늘었다. 8일엔 54일 만에 최다인 6만 2000여 명을 기록했다. 정기석 코로나19 특별대응단장은 7일 “12월에는 새 변이가 없더라도 어느 정도의 유행은 불가피하다”고 밝혔다. 계절 특성상 겨울에는 면역력이 떨어지고, 상대적으로 바이러스는 훨씬 더 많이 창궐하기 때문이다. 사회 상황이 좋아지기는커녕 오히려 새로운 어려움이 더하는 지경이다. 사정이 이렇게 흘러가니, 연말연시 분위기가 살아날 리가 없다.
그러나 어느 정도 불가피성은 인정한다고 해도, 전 국민이 집단적인 우울감에 빠지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이태원 참사와 관련한 안전시스템 재구축, 책임자 처벌 등은 당연히 당국이 절차에 따라 진행해야 한다.
이와 별개로 정부는 국민의 정신적 일상 회복에도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애도 기간이 끝났다고 슬픔이 사라지는 건 물론 아닐 테다. 또 연말연시를 즐긴다고 해서 희생자를 애도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국민적인 아픔을 극복하고 일상을 회복할 기회는 열려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어려운 상황이지만, 국민이 올 연말연시를 이런 바탕 위에서 보낼 수 있도록 하는 것도 국가의 책무일 것이다.
곽명섭 논설위원 kms01@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