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일 잘됐다고 좋아했더니 가격 반토막… 풍년의 역설

김현우 기자 khw82@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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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산지 태풍·병충해 피해 적어
올 사과 52만t·배 24만t 생산 예측
수확량 넘쳐 가격 26~13% 하락
농민 추가비용 들여 저온창고에 저장

수출되지 못하고 저온창고에 가득 쌓여 있는 감. 김현우 기자 수출되지 못하고 저온창고에 가득 쌓여 있는 감. 김현우 기자

“풍년인데 오히려 부담이 커졌습니다. 남아도는 과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사과와 배 등 과일 농사가 풍년을 맞았지만 농민들은 한숨을 내쉬고 있다. 예년 대비 과일 생산량이 늘면서 가격이 크게 떨어졌고, 판로 확보도 쉽지 않다.

올해 과일 생산량은 당초 예측량을 훨씬 웃돌고 있다. 8월까지만 해도 평년 수준이 될 것이란 전망이 나왔는데 막상 수확철로 접어들자 수치가 대폭 재조정됐다.

지난해 통계청의 ‘농작물 생산 조사’ 자료를 보면 전국적으로 사과는 51만 5000t, 배는 21만t, 단감은 9만 9000t 생산됐다.

이상저온과 가뭄, 태풍으로 생산량이 뚝 떨어졌던 2020년에 비해 생산량이 각각 사과 18%(2020년 42만 2000t), 배 38%(13만 2000t), 단감 10%(8만 9000t) 오른 수치다.

올해 생산량은 더 많을 전망이다.

9일 한국농촌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올해 과일 예측 생산량은 사과 52만 5000t, 배 24만 5000t, 단감 11만 2000t이다. 지난해에 비해 각각 2%, 17%, 10% 늘어난 것이다.

과일 생육이 좋은 이유는 올해 과일 주산지 중심으로 태풍 피해가 크지 않았고, 맑은 날이 많았기 때문이다. 또 가을철 기상이 좋아 과일이 잘 자랐고 병충해 발생도 적다.

농사는 어느 때보다 순조로웠지만, 농가 분위기는 그리 좋지 않다. 올해 수확한 과일의 당도가 높고 맛이 뛰어나지만 가격은 오히려 지난해보다 크게 떨어졌다.

진주농산물도매시장 공판장의 11월 초 과일 경매가를 보면 10kg 사과 한 박스 가격은 지난해 4만 7000원에서 올해 3만 5000원으로 26% 하락했다. 배는 15kg 한 박스 기준 3만 1000원에서 2만 7000원으로 13% 떨어졌다.

단감 역시 중간 크기 10kg 한 박스가 지난해 이맘때쯤 2만 5000원선이던 것이 올해 1만 7000원대까지 30% 이상 하락한 것으로 나타났다. 수확량이 많았을 때는 가격 격차가 더 크게 벌어지기도 했다.

경남 진주시에서 배 농사를 짓고 있는 김종회 씨는 “가격이 지난해 대비 30% 정도 떨어졌는데도 시중에 물량이 많이 풀려 나가질 않는다”고 말했다. 단감 농사를 짓는 백진석 씨도 “하루 인건비만 60만 원 넘게 들고 농자재, 면세유까지 안 오른 게 없다”며 “농가 손해가 막심하다”고 덧붙였다.

수출량이 늘면 국내 가격 안정에 도움이 되겠지만 이마저도 쉽지 않다. 대부분 수출 단체는 물론이고, 농협조차 해외 판로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대형 수출 시장인 동남아시아가 코로나19 여파로 허리띠를 졸라매고 있는 데다 중국 역시 과일 풍년을 맞으면서 물량이 쏟아지고 있다. 해외 바이어들은 가격 동향을 주시하며 거래를 미루고 있는 실정이다. 진주원예농협은 해마다 동남아에 배 수십t을 수출해 왔지만 올해는 단 한 박스도 수출하지 못했다.

진주원예농협 관계자는 “수출하기 위해 물량을 쌓아뒀지만 소식이 없다”며 “바이어가 계약을 미루고 있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진주의 한 개인 저온저장고. 배가 빈틈 없이 가득 차 있다. 독자 제공 진주의 한 개인 저온저장고. 배가 빈틈 없이 가득 차 있다. 독자 제공

일부 영농법인은 해외 대형마트와의 직거래로 활로를 찾고 있다. 한국배영농조합법인은 캐나다와 호주 등 세계 각지에 배를 수출하는데 수출·수입업체를 거치지 않고 현지 대형마트와 직접 계약한다. 중간 마진을 없애 가격 경쟁력을 갖추는 것으로, 실제 올해 수확량 전체를 이미 가계약한 상태다.

김건수 한국배영농조합법인 대표는 “원활한 수출과 농민들의 수익을 보장하기 위해서 현지 직거래를 선택했다”며 “유통구조를 개선하는 게 힘들지만 성과를 내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대다수 법인과 농민들은 이와 같은 노하우가 없어 당장 앞길이 막막하다. 울며 겨자 먹기로 돈을 들여 저온창고에 물량을 저장하고 있다. 가격이 어느 정도 안정되면 서서히 풀겠다는 생각이지만 미래가 불투명하다.

한 농민은 “돈을 들여 저온창고에 넣어두는데, 언제 가격이 오를지 기약이 없다”면서 “모든 농민들이 눈치 싸움을 하고 있는 것 같다”고 토로했다.


김현우 기자 khw82@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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