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반상의 최다르크

김건수 논설위원 kswoo333@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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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은 인류가 낳은 놀이 중 가장 높은 지적 능력을 요구하는 보드게임이다. 가로세로 19줄, 361개의 교차점에 돌로 에워싼 빈 공간을 만드는 것이 목적이다. 룰은 간단하지만 경우의 수는 무한대다. 2016년 바둑판에 배치 가능한 수가 계산됐는데 대략 10의 171제곱. 우주 전체의 총 원자 개수(100의 80제곱)보다도 많고 이름이 붙은 수의 가장 큰 단위인 ‘구골’(googol·100의 100제곱)을 뛰어넘는 수준이다. ‘반상 위의 우주’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것이다. 정해진 방법이 없는 대신 활동이 자유롭다는 점이 바둑의 승부를 가른다.

그래서 전문 프로기사들 간의 대국은 치열한 수의 전쟁이다. 그 치열함은 피를 토할 정도다. 실제로 일본 막부 시대 나흘간의 대국 끝에 바둑판 앞에서 피를 토하고 죽은 젊은이가 있었다. 열정적인 바둑 팬이라면 비장한 냄새가 진동하는 이 ‘토혈국(吐血局)’ 스토리를 한 번쯤 들어 봤을 테다. 바둑의 흡인력은 중독성으로 연결된다. “신선놀음에 도낏자루 썩는 줄 모른다”는 옛말이 바로 그것이다. 조선 시대 내내 바둑은 엄청난 인기를 지닌 도박이었고 사회적 문제도 꽤나 많았다. 바둑이 이런 풍토에서 벗어난 것은 일제강점기 이후 한국기원을 세운 조남철 9단의 공로가 크다. 그는 내기 바둑을 강력하게 배척했다고 한다.

반상 위든, 반상 바깥이든, 바둑은 천변만화, 무궁무진의 풍경을 만든다. 8일 최정 9단의 2022 삼성화재배 월드바둑마스터스 준우승 소식도 그중 하나다. 메이저 바둑 대회 준우승은 전 세계 그 어떤 여성 기사도 닿은 적 없는 눈부신 업적이다. 최정은 10여 년 전부터 성별 구별이 없는 각종 바둑 대회에 참가해 한국은 물론 중국과 일본의 내로라하는 남자 기사들을 잇따라 격파했다. ‘최다르크’라는 별칭이 거기서 나왔다. 107개월째 한국 여자 바둑 1위, 그 끝없는 도전의 여정 중에 일군 이번 쾌거가 결코 우연일 리 없다는 뜻이다.

전 세계 바둑 상위 랭커들은 대부분 남자다. 바둑은 장시간 집중을 요하는 까닭에 육체적 에너지 소모가 크지만, 체급·체격에 따른 구분이 별로 의미가 없어 그 승부가 비교적 명쾌한 두뇌 스포츠이기도 하다. 물론 남녀의 기량 차이를 설명하는 여러 가설이 있다. 예컨대, 비이성적이고 감정에 치우치는 여성의 심리적 열등감 같은 것. 하지만 뚜렷한 근거는 없다. 최정 9단의 성취는 이런 통념과 편견을 깨고 무한한 가능성을 일깨울 또다른 21세기 여성 히어로의 등장을 기대하게 한다.


김건수 논설위원 kswoo333@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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