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꼭 부산 출신이어야 합니까?"

권기택 기자 ktk@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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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기택 서울지사장

글로벌 문호 개방시대 부응위해
이제 ‘부산 순혈주의’ 벗어나야
유력 기업 유치와 CEO 인선에
출신보다 능력·자질 우선해야
‘선택’아닌 ‘생존’ 차원의 개방성
엑스포 유치 역량 결집 선결조건

‘흑묘백묘(黑猫白猫)’란 말이 있다. 중국 최고 지도자 덩샤오핑(鄧小平)이 취한 개혁·개방정책으로,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뜻이다.1979년 미국을 방문하고 돌아온 덩샤오핑은 “자본주의든 공산주의든 상관없이 중국 인민을 잘 살게 하면 된다”며 이 정책을 밀어붙여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중국식 사회주의를 탄생시켰다.

이 시점에서 이 말이 왜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을까. 아마도 부산에 가장 필요한 사고방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우리는 “부산답다”거나 ‘부산 싸나이’란 말을 유달리 좋아한다. 부산에서 태어나거나 중·고교를 다니든지, 그것도 아니면 ‘남성다움’을 갖춰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게 필요한 적이 있었다. 오늘날 부산이 대한민국 제2의 도시로 성장하기까지 ‘부산다움’이 큰 힘이 됐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우리가 언제까지 그런 정서에 갇혀 있어야 할까. 언제부턴가 이 말이 ‘배타주의’ ‘지역이기주의’로 변질된 것은 아닌지 되짚어 봐야 한다. 세계 모든 국가와 지역이 경쟁적으로 문호를 개방하는 시대에 말이다.

박형준 부산시장이 지난해 부산시장 보궐선거에 출마했을 때 일부 정치인들이 그의 ‘출신’ 문제를 제기했다. 그가 부산에서 태어나 30여년 간 대학교수로 몸담았고, 온갖 시민단체 활동을 펼쳤으며, 국회의원과 청와대 수석으로 재직하면서 부산 발전을 위해 부단히 노력했는데도, 단지 중·고교를 이곳에서 졸업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부산사람이 맞나”고 공격한 것이다. 한심하기 그지 없다. 그들에겐 미안한 얘기지만 박 시장은 1995년 지방자치제가 도입된 이래 가장 유능하다고 평가받으며, 지난 6월 지선에선 70%에 가까운 압도적 지지로 재선에 성공했다.

‘부산 우선주의’는 국회의원 총선거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총선 때마다 가장 많이 따지는 게 ‘출신 고교’다. 실제로 전체 부산 국회의원 중 부산에서 고교를 나오지 않은 사람은 3명밖에 없다. 대체로 ‘부산 연고성’에 집착하는 정치인일수록 의정활동 성적이 부실하다.

우리는 더욱 냉정해져야 한다. 부산이 독자적으로 세계 일류 도시로 도약하기 힘들다는 냉혹한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 지난해 매출액 기준으로 한국 100대 기업에 포함된 부산 업체는 1개도 없다. 2002년 해당 조사가 시작된 이후 최악의 성적이다. 부산 1위인 르노코리아는 전국 120위이고, 2위인 부산은행은 189위이다. 겨우 한국 1000대 기업에 부산이 27개 포함됐을 뿐이다. 정말 부끄러운 자화상이다.

결론은 분명하다. 세계 일류 기업을 유치해야 한다. 그것이 힘들면 대한민국의 최고 기업을 끌고 와야 한다. 그래야 일자리가 생기고 청년들이 부산을 등지지 않는다. 그러려면 우리 스스로가 ‘부산 집착’에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 물론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고 비슷한 능력의 소유자라면 부산 출신을 우선하는 게 너무나 당연하다. 그런데 능력이나 비전이 절대 부족한 데도 단지 ‘우리 사람’이란 이유만으로 부산을 고집해선 안 된다.

때마침 부산의 몇몇 유력기업과 공기업에서 CEO 인선을 앞두고 있다고 한다. 노조를 비롯한 일부 진영에서 ‘내부 승진’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다. 그들의 입장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능력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렇 게 하는게 맞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능력이나 자질이 최우선 기준이 돼야지 ‘출생지’를 앞세워선 안 된다. 차라리 이들에게 ‘블라인드 채용’ 방식을 한번 추천해 보고 싶은 심정이다.

부산은 천혜의 자연환경을 갖췄다. 세계 어느 나라를 돌아다녀 봐도 부산처럼 산과 강, 바다가 함께 어우러져 있고, 교통이 잘 발달된 도시도 없다. 가덕신공항 건설과 산업은행 이전만 예정대로 추진되면 부산은 명실상부한 세계 최고의 금융·물류·해양·관광 중심도시로 발돋움하게 된다. 게다가 부산은 원래 대한민국에서 가장 개방적인 도시로 이름나 있다. 이를 더욱 계승·발전시키면 된다.

우리는 2030부산월드엑스포 유치에 사활을 걸고 있다. 우리가 반드시 유치해야 하고, 충분히 성공할 수 있다. 엑스포가 유치되면 6개월의 행사 기간 동안 약 3500만 명의 관람객이 부산을 찾게 되고, 약 43조 원의 생산 유발효과와 50만 명의 고용 유발효과가 발생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야말로 부산이 ‘대한민국 제1의 도시’로 거듭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단 여기엔 조건이 있다. 엑스포가 ‘부산만의’ 행사가 아니듯 부산이 모든 걸 주도한다는 생각을 가져선 안 된다. 정부와 대통령실, 대기업, 문화·체육계, 정치권 등 대한민국의 모든 역량이 결집돼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부산 순혈주의’의 틀을 하루빨리 벗어나야 한다. 그건 ‘선택’이 아닌 ‘생존’의 문제다.


권기택 기자 ktk@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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