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만 근거 부산까지 아우른 ‘동아시아 지중해 해상왕국’ [깨어나는 가야사]
[깨어나는 가야사] 4. 금관가야
전체 가야사 ‘8할’ 집약한 역사
김해 봉황동 대규모 왕성 구축
교역·철 생산 취락 계획적 배치
초월적 권력, 시조 신화 만들어
금관가야는 가야사 7~8할의 역사였다. 가야사의 거의 모든 것을 집약한 역사라는 말이다. 그 전의 가야사가 이 저수지로 흘러들었고, 그 후의 가야사가 이 저수지에서 흘러나왔다는 것이다. 금관가야의 ‘지리적 저수지’는 고(古) 김해만이었다. 오늘날 김해평야가 모두 바다였던 것이 고 김해만이다. 당시 낙동강 해수면을 보면 금관가야가 왜 독보적이었는지 대번에 알 수 있다. 금관가야 앞바다는 아주 널따랗고 절묘한 내해의 만으로 동아시아 지중해의 중요 거점이 되기에 아주 적당했다.
심지어 조금 위쪽 낙동강도 오늘날처럼 퇴적되기 전 곳곳에 내만(內灣)을 이루고 있었다. 그 내만을 근거지로 함안에선 아라가야가 성장하고 있었고, 창녕에선 비화가야가 등장할 것이었다. 대산면 주남저수지 일대도 아예 큰 만을 이룬 ‘고 대산만’이었다. 이곳에는 일찍이 기원전 1세기 다호리 세력이 자리를 틀었다가 금관가야 세력권에 편입됐다. 숱한 지류가 본류로 흘러들어 하류에 닿듯 ‘낙동강 역사체’인 가야의 물줄기는 굽이굽이 흘러 마침내 고 김해만, 금관가야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것이 이른바 전기 가야(연맹)의 모습이다.
물론 금관가야의 더 큰 면모는 철의 왕국으로서 바다를 열어젖히고 해상을 가로질러 일본 열도와 하나의 역사처럼 긴밀하게 이어졌다는 것이다. 금관가야의 북방 문화 요소까지 고려할 때 결국은 한·중·일이 어울리는 동아시아 해양 문화권을 만든 중심에 고 김해만의 금관가야가 있었다는 것이다.
532년 멸망한 금관가야는 4세기에 찬란한 전성기를 구가했다. 당시 큰 세력을 아우르면서 고대국가의 초기적 면모까지 보였다고 강조되기도 한다. 금관가야 중심은 3세기 후엽 낙랑·대방이 약화할 때 고 김해만에 닿는 조만천 일대의 양동리 세력(구야국)에서 해반천 일대의 대성동 세력(금관가야)으로 이동했는데 양자의 큰 차이는 세력 크기와 범위다. 금관가야 대성동 세력은 낙동강 건너 부산 복천동 세력까지 포섭했다. 복천동 경우도 동래패총이 있는 낙민동 온천천변 포구까지 배가 들어올 정도로 해수면이 오늘날과 판이해 ‘포구를 지닌 해상왕국’으로 칭해진다. 겹겹의 해상왕국이 금관가야였다.
금관가야는 내부와 그 권역에 걸쳐 중심과 주변의 잘 짜인 구조를 갖췄다. 우선 금관가야 중심부 자체부터 그러하였다. 특히 대성동 고분군과 짝을 이루는 인근 봉황동유적에 왕성이 구축됐다. 봉황동 토성은 백제 풍납토성, 신라 월성에 필적한다고 한다. 금관가야 수도에는 봉황동 왕성을 중심으로 관청, 지배층 거주지역과 고분군, 그 외곽을 둘러싸고 생산시설과 선착장, 창고 지역, 교역·교통 시설이 계층적이고 서열적으로 분포돼 있는 것이 발굴을 통해 확인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금관가야 권역 전체도 중심과 주변의 구조를 취했다. 중심에 대성동과 봉황동의 왕읍(王邑)이 있었고, 권역 주변으로 확산하면서 교역집단, 제철 생산집단, 토기 생산집단 등이 취락 유적별로 계획 배치된 분업 구조를 취했다. 고 김해만이 중심이었고 진례 진영 창원 부산 등으로 권력과 분업이 확산한 중심과 주변의 지배 구조였다. 발굴을 통해 도로까지 만들어진 것이 확인됐다.
주목할 것은 이전 단계에 볼 수 없었던 초월적 권력으로서 금관가야는 신화를 탄생시켰다는 점이다. 양동리 세력을 교체하면서 새로 부상한 대성동의 강력한 권력은 더 큰 정치체를 하나로 직조할 새로운 신화와 이데올로기가 필요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수로왕 탄생(기원후 42년) 신화와 허황옥 결혼(48년) 신화다. 허황옥 신화는 새로운 종교 체계로서 불교를 포함했다. 신화에는 이전의 역사적 사실이 깃들 수밖에 없다. 허무맹랑한 것이 아니다. 신화는 역사의 또 다른 얼굴이라 하지 않는가.
다만 신화가 역사 그대로인 것은 아니다.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어라’라는 구지가 구절처럼 기원과 전망, 가슴 속에 살아 있는 마음의 불꽃 같은 것이 들어 있는 것이다. 올해 발생한 김해 구산동 고인돌 훼손 사건은 참으로 안타까운 장면이었다. 1세기께 김해 지역에 터를 잡고 3세기 후엽~4세기 전성기를 누린 김수로왕의 금관가야 창건 신화와 연관된 세계 최대 규모 고인돌 유적이 훼손된 것이었다.
김수로왕 신화는 김해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금관가야의 역사적 광휘다. 경북 고령 대가야 신화에도 김수로왕이 등장한다. 가야 종주국으로서 금관가야의 위상을 보여주는 대목일 것이다.
일본 천손강림신화에도 ‘구지봉’이 나온다. 일본 천왕의 직계 시조가 내려왔다는 ‘구시후루타케(久士布流多氣)’가 그것이다. 학계는 둘을 발음이 거의 같은 동일 지명으로 보고 있다. 요컨대 금관가야 지배층이 일본 열도를 건너가 천왕족이 되었다는 것이다. 일본 〈고사기〉에 ‘구시후루타케’를 두고 ‘이곳은 좋은 곳이다. 가라쿠니(韓國)를 향해 있기 때문’이라고 적혀있는 것은 가야가 그들의 조국이라는 점을 시사한다는 것이다. 가야사 7~8할의 역사인 금관가야 신화가 일본 열도에까지 강하게 겹쳐 드리워져 있다는 것이다.
금관가야가 전성기를 구가하던 당대 중국은 좁혀 볼 때 5호 16국 시대(301~439)였고, 넓게 볼 때 위진 남북조시대(220~589)였다. 중원과 오랑캐, 중심과 주변, 한반도와 일본 열도의 경계 없이 동아시아 역사가 자유분방하게 꿈틀거리며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던 시대였다. 금관가야가 단일한 고대국가 형성 이전의 그 역사 지평 위에서 힘차게 용틀임하고 있었다.
최학림 선임기자 theos@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