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위트컴 장군과 부산세관 옛 청사
이용득 부산세관박물관장
6·25전쟁 당시 부산은 피란수도로서 포성 한 번 울리지 않은 후방지역이었다. 그렇지만 수많은 피란민이 갑자기 모여들어 아비규환의 도시가 되었고, 곳곳에 무허가 판잣집이 세워져 겨울이 다가오면 추위와의 싸움이 일상이었다. 가뜩이나 불을 가까이하다 보니 화마가 항상 곁에 도사리고 있어 위험을 품고 살아야만 했다. 이를 증명이나 하듯 1953년 11월 27일 저녁 무렵, 중구 영주동에서 갑자기 화재가 발발했다. 이 불은 순식간에 강풍을 타고 당시 번화가인 부산역 앞 일대를 불바다로 만들었다. 이게 부산역전대화재로서 사상자 29명, 주택 3132채가 완전히 소실되고, 이재민이 6000여 세대 3만여 명 발생했다. 특히 이 화재로 개항 이후 부산항의 3대 근대 상징적 건물이었던 부산역과 우체국이 불타 없어지고, 유일하게 르네상스풍의 부산세관 옛 청사만 살아남았다. 그 무렵 부산역과 세관은 직선으로 100여 미터 인근에 마주하고 있었다. 그날 화재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에 의하면 온 밤하늘에 불꽃이 강한 바람을 타고 난무했다고 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어떻게 부산세관 옛 청사만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이에 대한 궁금증은 전쟁발발 무렵, 미군에 징발되었던 부산세관의 청사활용 비밀문건이 해제되면서 새로운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다. 부산세관은 징발과 동시 제226병기창으로 사용되었다. 이 부대는 전투부대에 탄약을 비롯한 군수물품을 지원하는 제2군수사령부 소속으로서 미군은 OBD(Ordnance Base Depot)라고 불렀다. 청사는 감사관 사무실과 창고 등으로 사용되었고, 보세창고 6동에는 탄약과 수선 장비 등 일반보급품이 장치됐다. 이 정도였다면 유엔 군수기지사령부에서는 부산세관을 화마로부터 필사적으로 보호해야만 했던 것이다. 이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뒷받침이라도 하듯, 최근에 한 지인에게서 들은 이야기도 그러했다. 그의 아버지에 의하면 미군 소방대가 부산세관 옛 청사 앞에서 호수로 계속 물을 뿌리면서 화재 차단에 진력을 다하는 것을 보았다는 이야기였다.
이렇게 해서 부산세관 옛 건물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지만, 역전화재로 피해를 입은 본 현장은 암담했다. 여기에 팔을 걷어붙이고 사랑으로 다가선 사람이 바로 리처드 위트컴 유엔군 군수기지 사령관이었다. 그는 직권으로 군수물품을 풀어 이재민을 돕기 시작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역전화재의 조속 복구를 위해 기금과 체계적인 계획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먼저 그의 제안으로 유엔군 내에 AFAK(대한군사원조)을 탄생시켰다. 이어 기술력과 노동력이 우수한 미군 중심으로 복구사업을 펼치는 프로그램을 수립했다. 지역 행정기관과도 연계해 집중적으로 지원하는 형태로 발전됐다.
그 추진계획의 하나가 먼저 부산세관의 청사 반환이었다. 이 무렵 부산세관은 현 청사 건너편에 있는 조선운수회사 사무실을 빌려 사용하고 있었다. 그것도 창고를 개조한 건물이라 추위와 더위에 약해 어려움이 많았고, 비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빗물이 새어들었다.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 근무하는 것은 세관직원뿐만 아니라 민원인도 마찬가지였다. 전쟁 초기에 세관에 신고 되는 물품은 무상원조로 반입되는 생필품이 대부분이었지만, 점차 후반기로 가면서 외환차관으로 도입되는 재해복구 장비 등이 많았다. 이로 인해 부산항으로 들어오는 물동량은 날로 수량과 규모가 커졌고, 세관 수입 업무도 폭증했다. 이런 사정을 군수업무 책임자인 위터컴 장군은 모를 리 없었다. 부산세관의 기능을 제대로 살려 통관이 신속하게 이루어지는 것이야말로 전후 한국의 재건을 앞당긴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다.
역전화재가 발발하고 불과 2개월 후인 1954년 새해 벽두에 하나의 밝은 뉴스가 부산항 주변을 설렁이게 했다. 부산세관 청사반환 소식이었다. 반환식은 미군에 빌려준 지 3년 4개월 만인 1월 20일 부산세관 강당에서 열렸다. 유엔군을 대표해서 위트컴 장군, 우리나라 대표는 김신서 부산세관장이었다. 정부에서는 2개월 후에 재무부장관 명의로 위트컴 장군에게 감사패가 전달되었다. 세관 보세창고에 있던 화약류는 해운대 신시가지 쪽의 탄약고로 옮겨지고, 대신 수출입물품이 반입돼 본래 기능을 되찾게 되었다.
아파본 사람이 아픈 맘을 안다고 했다. 그동안 남의 사무실에서 어려움을 겪어본 세관직원들은 다시 배치된 사무실에서 업무를 보게 되자, 더없이 기쁘고 아늑했다. 그러나 우리의 수난의 역사와 함께 해온 부산세관 옛 청사는 영원히 부산항을 지켜주는 상징적 보루가 되지 못했다. 1979년 부산항 개항 100주년을 맞아 부산대교를 건설할 때, 진입로를 넓히는 과정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부산지방문화재 제22호라는 영예까지 안긴 건물이었지만, 철거하는 데는 아무런 구실이 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