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희와 함께 읽는 우리 시대 문화풍경] 다시, 예술이란 무엇인가
부산대 대학원 예술·문화와 영상매체협동과정 강사
뱅크시는 그래피티 아티스트다. 거리는 화폭이고 스프레이가 무기다. 최근 신작 7점을 폐허의 전장 우크라이나에 선보였다. 보로댠카에는 체조선수를 그렸다. 건물 잔해를 손으로 짚고 물구나무를 선 균형 잡힌 자세다. 작은 소년이 체구가 훨씬 큰 어른을 메어치는 모습은 어떤가. 다윗과 골리앗일까,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일까. 유도를 좋아한다는 푸틴을 조롱한 듯하다. 이르핀은 민간인 수백 명이 학살당한 마을이다. 가슴을 관통한 상처처럼 큰 구멍이 뚫린 건물 담벼락에 리듬체조 연기가 펼쳐진다. 뱅크시는 파괴된 도시의 잔해물을 역동적인 몸짓들로 재건했다. 꽃다발을 힘껏 던지는 시위자나 폭탄을 꼭 끌어안은 소녀처럼 모순적이다. 절망과 희망의 병치! 과연 뱅크시답다.
1980년대 말부터 소련에는 정치경제뿐만 아니라 문화에도 자유의 물결이 스며들었다. 고르바초프 정권이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 정책으로 개혁과 개방을 추진한 덕분이다. 빅토르 최는 ‘우리는 변화를 원한다’를 노래하고, 추방당했던 솔제니친이 귀환했다. 새로운 시대는 도래했는가. 2012년 푸틴이 재선에 성공하자 전제정치의 유령이 다시 나타났다. 예술가들은 저항했다. 펑크록 그룹 푸시 라이엇은 게릴라 공연으로 도발했다. 폴 매카트니와 마돈나 등 세계적인 뮤지션들이 표현의 자유를 지지했음에도 훌리건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더 과격한 방식을 취하기도 했다. 표트르 파블렌스키는 입을 실로 꿰매거나 알몸에 가시철조망을 둘렀으며, 붉은광장에서 음낭에 못을 박기도 했다. 과도한 노출과 자해로 비난을 받았지만 무소불위의 권력을 전경화하며 희망 없는 정치체제에 저항했다. 이즈음 러시아 음악인들의 목소리는 어떠한가. 차이코프스키 콩쿠르가 국제콩쿠르연맹에서 퇴출당하고, 젊은 음악가들이 반전을 외치는데도 정작 러시아 음악인들은 극도로 말을 아낀다. 선전음악회를 거부한 우크라이나 지휘자의 안타까운 죽음에도 오로지 침묵으로 일관할 뿐이다.
뱅크시의 정체는 수수께끼다. 한 사람인지, 그룹인지도 알 수 없다. 자칭 예술 테러리스트다. 편안한 사람을 불안하게 하고, 불안한 사람을 편안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 뱅크시의 예술관이란다. 소더비 경매에서 낙찰된 작품을 파쇄하고, 쇼핑카트를 미는 원시인 그림을 영국박물관에 몰래 전시했다. 예술권력과 자본주의, 예술계의 관행을 한껏 비웃었다. 작품의 주제는 분명하다. 전쟁과 난민, 빈곤과 질병, 환경 문제가 그것이다. 참여하는 예술, 행동하는 예술은 강력한 상징이자 구호다. 누가 예술의 종말을 노래했나. 순수예술이라는 관념이 죽었을 뿐 예술은 종말하지 않았다. 우크라이나에서 뱅크시가 보여준 것은 황폐한 삶에 희망을 심는 예술, 전쟁을 기억하고 약자의 강함을 드러내는 무기로서의 예술이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오래된 질문을 다시 마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