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관가야, 궤멸 수준 패배… 신라는 낙동강 하류 진출 [깨어나는 가야사] 5.

최학림 선임기자 theo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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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나는 가야사] 5. 고구려 남정 ‘타격’

고구려·신라-가야·백제·왜 전쟁
가야사 근본적으로 뒤흔든 사건
부산 복천동, 신라 쪽으로 기울어

가야사 전후기의 분수령을 이룬 400년 고구려 남정 이후 부산 복천동 세력은 신라 쪽으로 많이 기울었다고 보고 있다. 복천동 고분군. 부산일보 DB 가야사 전후기의 분수령을 이룬 400년 고구려 남정 이후 부산 복천동 세력은 신라 쪽으로 많이 기울었다고 보고 있다. 복천동 고분군. 부산일보 DB

400년 고구려 광개토왕 남정(南征)은, 3세기 초 포상팔국 전쟁에 이어 가야사를 근본적으로 뒤흔든 두 번째 역사적 사건이었다. 이로 인해 금관가야는 궤멸에 가까운 큰 타격을 입는다. 이 남정은 전기 가야와 후기 가야의 분수령이다. 김해 금관가야가 어엿한 고대국가로 가는 길이 막혀버렸고, 이후 금관가야를 대신해 고령 대가야가 ‘가야 역사체’의 전면에 서서히 부상한다. 그것을 가야사 전기와 후기로 구분하는 것이다.

물론 세부적으로 보면 전기는 금관가야와 아라가야 중심이었으며, 후기는 대가야와 아라가야, 소가야, 비화가야, 약화한 금관가야 등으로 이뤄진 좀 더 다단한 시기였다.

광개토왕비에 기록된 400년 고구려 남정은, 고구려가 보병·기병 5만을 보내 신라를 구원했다는 내용이다. 이미 가야-왜 연합군(원문에는 왜)이 신라 경주(신라성)를 압박하고 있었다. 신라의 요청을 받은 고구려군이 쇄도해 가야-왜 연합군을 물러나게 했는데 ‘임나가라 종발성’까지 쫓아가 항복시켰다는 것이다. 글자 누락으로 광개토왕 비문 내용의 이모저모에 대해 많은 다양한 해석이 가해지지만 대체로 이때 금관가야가 궤멸할 정도로 큰 타격을 입은 것으로 보고 있다.


철로 만든 판갑옷(板甲). 독립기념관 제공 철로 만든 판갑옷(板甲). 독립기념관 제공

고구려 남정은 여러 측면을 지닌 전쟁이었다. 고대사의 필연적인 진전이랄까. 4세기 말~5세기 초 한반도 전체는 전쟁에 휩싸이고 있었다. 거기에 일본 열도 왜까지 포함돼 있었기에 고구려 남정은 일종의 동아시아 전쟁이었다. 당시 한반도와 일본 열도를 아우른 ‘각축의 바둑판’ 위에서 ‘고구려-신라’ 2국 동맹과 ‘백제-가야-왜’ 3국 동맹, 양대 축이 본격적으로 맞붙은 전쟁이었다.

남정의 주목적은 무엇보다 고구려가 백제를 견제·제압하는 것이었다. 고구려와 백제는 양강으로서 4세기 후반 ‘30년 전쟁(369~399)’을 벌이고 있었다. 대규모 전쟁만 해도 10여 차례 치렀다. 대표적 사건은 371년 백제 근초고왕 공격으로 평양성에서 고구려 고국원왕이 사망한 것이다. 그러나 391년 고구려 광개토왕이 즉위하면서 고구려가 압도적으로 강해졌다.

이에 백제는 고구려의 치명적 위협 속에서 가야-왜를 잇는 3국 동맹 축을 더욱 강화하면서 활로를 모색했다. 그러자 고구려는 백제 동맹국을 제압하기 위해 신라 지원, 금관가야 공격에 나선 것이다. 고구려 남정은 몇 수가 얽혀 있는 서로 물고 물리는 전쟁이었다. 이 전쟁의 압도적인 승자는 고구려였고, 뜻밖에도 가장 큰 타격을 입은 것은 금관가야였다. 고구려는 백제가 향후 몇십 년 기를 못 펼 정도로 그 ‘손발’을 아주 끊어냈고, 신라에 대해서는 속국 대하듯 정치적 간섭을 행사한다. 왜는 일본 열도로 퇴각하면 그뿐이었다.


독립기념관 광개토대왕 복원비. 독립기념관 제공 독립기념관 광개토대왕 복원비. 독립기념관 제공

하지만 신라로서는 고구려의 간섭을 받는 대신 커다란 이익을 챙긴 게 있었다. 금관가야가 큰 타격을 입은 결과, 신라가 낙동강 하류에 진출한 것이다. 이때 금관가야의 양대 축인 부산 복천동 세력이 신라 쪽으로 많이 기울었다고 보고 있다. 요컨대 고구려 남정의 또 다른 결과적 측면은 낙동강 패권을 둘러싼 가야와 신라의 충돌이라는 것이다. 가야사 관점에서 볼 때 이전 포상팔국 전쟁이 가야 내부 충돌이었다면, 고구려 남정은 가야와 신라의 격돌이었다는 것이다.

이후 가야사 궤적은 어떻게 되었을까. 근년 다른 해석 가능성이 있는 유적이 발굴되긴 하지만, 400년 고구려 남정으로 대성동 고분군 수장묘 축조가 중단됐다는 것이 통설이다. 그 통설과 연관한 가장 센 주장은 금관가야, 전기가야 연맹의 궤멸적 타격 이후 가야 엘리트층과 유민이 크게 두 곳으로 흘러갔다는 것이다.

첫째 흐름은 5세기대 낙동강을 따라 내륙 곳곳으로 진출해 새로운 가야를 세웠다는 것이다. 5세기 전반 함안 아라가야의 경우, 토착 세력이 유이민을 받아들여 사회 혁신을 꾀했다고 본다. 5세기 중반 합천 다라국과 창녕 비화가야가 성립했는데 이 중 다라국은 부산 복천동 세력이 토착 주민을 누르고 새로운 나라를 세웠다는 주장이 있다. 5세기 후반 고령 대가야의 경우도 김해 대성동 세력이 선주민을 누르고 나라를 세웠다는 주장이 있다. 후기 가야 소국들의 성립이 과연 외부 자극에 의해서냐, 자체적 발전에 의해서냐 하는 시각이 엇갈리지만, ‘강한 주장’에 따르면 금관가야 엘리트층이 유입돼 이른바 후기 가야를 열었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금관가야가 가야사 7~8할의 역사라는 것이다.

둘째 흐름은 바다 건너 일본 열도로 이어져 일본 고대사 발전을 촉진했다는 것이다. 야요이 시대 초창기가 벼농사를 전한 제1 도래인 시대였다면, 가야인들이 대거 열도로 넘어간 이때가 제2 도래인 시대였다. 5세기 초엽 가야 도래인들은 철기에 의한 기술 혁신 시대를 열면서, 일본 열도 곳곳으로 확산한다. 그 혁신적 자극에 힘입어 일본 열도는 북부 규슈 쓰쿠시(筑紫), 오카야마현~히로시마현 동부의 기비(吉備), 시마네현 동부의 이즈모(出雲) 등 각 지역 대수장 지배체제가 강화되면서 장차 야마토 정권의 긴키(가와치 세력)가 왜 왕권의 중심, 고대국가 체제를 구축해나갈 것이었다.


최학림 선임기자 theo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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