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도 작품도…다음을 위한 경계에 서다
비움·비침으로 현실·가상 그려
한국화가 이민한 작가 개인전
30일까지 해운대 갤러리조이
“변화 기로에 놓인 내 이야기”
작품도 작가도 ‘경계’에 섰다. 전시 ‘경계에 서다’는 현실과 가상 사이를 보여주는 작품과 작업 변화 과정에 놓인 작가 자신을 보여주는 전시다.
부산대 미술학과 이민한 교수의 개인전 ‘경계에 서다’가 부산 해운대구 갤러리조이에서 열리고 있다. 30일까지 이어지는 이번 전시는 열 번째 변화를 향해 나아가는 ‘한국화가 이민한’을 보여준다. “처음에는 인물 내면의 심리를 추상적 배경이나 소품으로 드러내는 작업을 했어요. 서예적 필치로 인간 모습을 그리고, 먹을 쌓아 올리는 적묵법으로 산수화 시점의 도시를 그리고, 명상적 풍경을 그리는 식으로 아홉 번 정도 변화 과정을 거쳤죠.”
‘경계에 서다’ 시리즈는 표현과 비표현의 경계를 이용해 화면에 생명력을 불어넣은 작업이다. 겨울날 헐벗은 나뭇가지와 쓸쓸한 강물의 이미지가 소복이 쌓인 눈을 도드라지게 만든다. 하지만 그림 속 눈은 아무것도 칠하지 않고 비워둔 여백, 종이 그 자체이다. “(일부러) 눈처럼 표현한 것인지, 그냥 비워둔 것인지. 대상을 나타내고 또 나타내지 않는 것 속에서 어떤 대상이 발견되도록 하고 싶었어요.” 의도적 비움은 때로는 눈이 되고, 때로는 물이 된다.
전시에서 물에 비친 이미지를 많이 볼 수 있는 것도 같은 이유다. “요즘 메타버스 등 가상 세계 이야기를 많이 하잖아요. 물에 비친 것을 통해 ‘현실 속에 존재하는 가상’을 그림에서도 느낄 수 있도록 했죠.” 물에 비친 산을 그린 ‘산그림자’ 시리즈는 작가가 예전부터 해오던 작업. “이번에는 색을 넣어서 노을을 표현했죠. 바탕에 주홍빛을 칠하고 위에 먹을 올려, 저녁노을에 잠긴 강물과 하늘을 그렸어요.” 반짝이는 윤슬처럼 보이는 것은 흰색을 사용했는데, 주변이 노란색이라 은분처럼 보이는 것이라고 작가는 설명했다. “물고기가 뛰어오를 때 물방울이 튀는 그림에서는 먹에 운모를 섞어서 그려보기도 했어요.”
‘관물청심’ 시리즈는 사물과 대화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관(觀)은 사물을 보면서 사물의 정수를 꿰뚫어 보고, 사물의 마음을 듣는다는 의미입니다. 어떤 뜻이나 마음을 사물에서 빌어오는 것으로, 소재나 내용은 전통을 가져오고 기법은 저의 기법을 사용했어요.” 이 작가는 물고기 숫자에 따라 의미하는 내용이 다르다고 했다. “물고기 아홉 마리가 등장하는 ‘구여도’는 아홉 구(九)와 오랠 구(久)가 같은 발음이라는 점에서 ‘선비의 여유가 오래도록 지속되라’는 뜻을 가져요. 송어를 그린 이유는 ‘회귀성 물고기’라는 생태적 특성을 반영한 것이죠.”
물에 비친 새의 모습을 그린 ‘공유허실’은 실체와 가상, 두 개의 자아를 대립시켜 보여준다. 이 작가는 “다음에는 진짜 새는 날아가고 물에 비친 새만 남은 모습으로, 즉 실체는 사라지고 허상이나 잔재만 남은 것을 표현하고 싶다”고 말했다. 2022년에 다시 그린 도시 작업까지, 이번 전시는 기존 작업과 새 작업을 한자리에 풀어낸 느낌이다. 이에 대해 작가는 동화적 느낌이 강한 ‘길 없는 길’ 그림을 거론했다.
“한마디로 제가 길을 잃은 거죠. 이번 전시에서는 한국적인 것과 서양적인 것, 수묵과 채색, 전통과 현대 그리고 표현 문제에 있어 그리려고 하는 대상과 나의 경계, 드러냄과 숨김, 의식과 무의식의 양쪽을 넘나드는 ‘경계’에 나를 두고자 했어요.” 갤러리 입구 거대한 폭포를 그린 ‘관물청심-폭포2’에 등장하는 사람은 어쩌면 새로운 길을 찾는 이민한 작가의 뒷모습이 아니었을까.
오금아 기자 chris@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