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조선의 불꽃 통신
사회부 에디터
공포나 조난 상황을 다룬 영화를 제작할 때 가장 힘든 것은 휴대폰을 어떻게 처리할까 하는 것이다. 주인공들이 휴대폰으로 도움을 요청하고, 경찰이나 소방대원들이 곧장 달려온다면 영화 전개가 무척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감독이나 시나리오 작가들이 주로 애용하던 방법은 휴대폰을 물에 빠뜨리는 상황을 만드는 것인데 요즘엔 방수 기능을 갖춘 스마트기기 때문에 이마저도 쉽지 않다. 더욱이 스마트폰과 블루투스로 연결된 전자시계 등 견고한 전자장비들까지 널리 보급되면서 공포나 재난 영화가 곧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농담까지 나온다. 영화계의 이런 애환은 지금 우리 사회가 실시간으로 연결되고, 소통하는 사회로 진화했다는 것을 보여 주는 한 단면이라고 할 수 있다. 심지어 이제는 지진 등의 상황이 발생할 때 거의 전 국민에게 재난 문자 메시지를 동시 발송하는 것도 일상이 된 상황이다.
하지만 전화가 발명되기 전에는 소식을 전하려면 직접 찾아가거나 편지를 써 파발 제도를 이용하는 등 주로 인력에 의존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렇지만 외적에 의한 국가 침략 사태 등이 발생했을 때에 대비해 한층 긴급하게 소식을 전할 수 있는 통신 수단이 절실했다. 그렇게 고안된 것이 높은 산꼭대기에 봉수대를 연이어 설치하는 방식이었다. 낮에는 연기를, 밤에는 불꽃을 이용해 정보를 먼 곳까지 전달한 봉수는 최초의 원거리 통신이라고 할 수 있다. 요즘 전파중계기와 같은 역할을 했다고도 할 수 있다.
조선시대 전국 봉수대의 숫자가 600개 이상이었다고 전해지며 120여 년 전인 1895년까지 운영됐다. 봉수 굴뚝에서 올리는 연기나 불꽃 수로 메시지를 전했다. 적이 나타나면 두 개, 적이 국경 가까이 오면 세 개, 침략 상황에서는 네 개로 각각 늘리는 방식이었다. 소식이 부산에서 한양까지 도달하는 데는 12시간가량 소요되었다. 스마트폰에 익숙한 현대인에게는 무척 느리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연락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문화재청은 조선시대 봉수 유적 16개를 국가지정문화재 사적으로 지정 예고했다. 이 봉수들은 왜구의 침입을 알리기 위해 설치한 것이다. 봉수 유적이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동안 상당수 봉수 유적은 적극적인 보호에서 소외되어 있었다. 뒤늦은 감은 있지만 이번 사적 지정이 최초의 원거리 통신인 봉수에 대한 체계적인 보존 관리와 복원을 위한 시발점이 되길 기원한다.
천영철 기자 cyc@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