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로365] ‘누칼협 세대’의 이유 있는 냉소
이동수 청년정치크루 대표· 공모 칼럼니스트
요즘 2030 청년들 사이에서 가장 많이 거론되는 단어가 있다면 단연 ‘누칼협’이다. ‘누가 칼 들고 협박이라도 했냐’의 줄임말인 누칼협은 누군가 고충을 토로할 때 그 책임이 오롯이 개인에게 있다고 주장하는 신조어다. 외부의 강요 없이 자기 의사에 따라 선택한 일이라면, 그 선택에 따른 결과도 전적으로 개인이 짊어져야 한다는 뜻이다. 비슷한 말로 ‘네가 선택한 일이니 악으로 깡으로 버텨라’라는 의미의 ‘악깡버’가 있는데, 예를 들어 유부남인 친구가 결혼 생활의 고충을 털어놓을 때 “네가 선택한 결혼이니 악깡버 해라”라고 하는 식이다.
누칼협과 악깡버로 대표되는 청년들의 정서는 결코 비주류가 아니다. 실제로 이 단어들은 이미 온라인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사람들은 소셜 미디어와 온라인 커뮤니티, 유튜브를 막론하고 이 단어를 사용하며 세상만사에 ‘내 알 바 아니다’라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이러한 문화는 특히 2030 남성들을 중심으로 강력하게 공유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들은 ‘누칼협 세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쩌면 이는 20년 터울을 하나로 묶은 ‘MZ세대’보다 본질에 더 가까운 단어일지도 모른다.
‘누가 칼 들고 협박이라도 했냐’
자유 의사 따른 선택은 개인의 책임
2030 세대 극단적 개인주의 치부
약자 향한 조롱 아닌 사회 향한 냉소
사회가 불공정하다는 반감과 분노
부조리한 사회 신뢰 회복이 해결책
누칼협이라는 단어가 대두되기 시작한 건 지난해 여름부터지만 본격적으로 언론에 등장한 건 이태원 참사 때다. 참사 발생 이후, 일부 인터넷 공간에선 “그러길래 누가 이태원 가라고 했냐?”는 식의 극단적인 게시글들이 올라왔고 많은 언론이 이를 비판하며 청년들의 개인주의와 이기주의가 극에 달한 듯이 묘사했다. 누칼협은 그런 ‘못난 청년’들을 상징하는 단어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개인적으론 생각이 다르다.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을 조롱했던 건 극히 일부의 여론이었을 뿐이다. 많은 청년이 그런 의견에 동조하지 않았을뿐더러 누칼협이라는 단어의 용례도 대체로 이태원 참사와는 결이 다르다. 혹자는 이 단어가 사회적 약자에 대한 조롱을 담고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지만, 사실 누칼협은 약자에 대한 조롱이라기보다 사회를 향한 냉소에 가깝다.
누칼협은 대개 자유의지에 따른 선택이 가능한 대상들을 향한다. 예컨대 먹고살려고 고된 일을 하는 노동자가 처우 개선을 요구할 때 “누가 그런 일 하라고 칼 들고 협박했느냐”고 나무라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에겐 사실상 선택지가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무원이나 대기업 회사원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일례로 지난여름 공무원들이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집회를 열었을 때나 카카오 직원들이 우리사주 ‘빚투(빚내서 투자)’에 나섰다가 주가 폭락으로 큰 곤혹을 겪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청년들이 모인 온라인 공간에서는 누칼협이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그들에게는 안정적인 일자리가 있고, 비교적 괜찮은 사회적 위치에서 선택이라는 걸 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진다고 여기는 이유에서다.
이 사회가 불공정하다는 반감과 분노, 그 감정들은 누칼협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다. 청년들은 이 나라의 사회적 자원 배분이 때로는 정치 논리로, 때로는 구조적 이유로 왜곡되고 있다고 여기고 있다. 지난 7월 서울회생법원이 가상화폐나 주식투자 실패로 돈을 날린 채무자도 개인 회생을 통해 면책받기 쉽도록 해 주겠다고 했다가 논란이 일었던 게 대표적이다. 법원은 “다른 자산과의 형평성을 맞추기 위함”이라고 밝혔지만, 많은 청년이 “열심히 일한 사람은 바보냐”, “왜 스스로 빚내서 주식·코인 투자한 사람의 채무를 사회가 떠안아야 하느냐”며 반발했다. 같은 맥락에서 이들은 금리 인상에 따른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아 투자)’족의 아우성에도 차가운 시선을 보낸다. 만약 집값이 계속 올랐다면 그 이익은 순전히 영끌을 감행한 개인의 몫이 되었을 터, 상황이 달라지자 정부에 대책을 요구하는 건 ‘이익의 사유화, 손실의 사회화’에 지나지 않다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누칼협에는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거나 한바탕하려다가 실패한 이들의 떼쓰기를 정부나 정치권이 부당하게 들어주고 있다는 심리가 내재한 셈이다.
누칼협은 결국 사회적 신뢰의 문제다. 묵묵히 노력하는 사람이 아니라 목소리 큰 사람이 우대받는 현실에 대한 염증과 공공의 자원이 부당하게 배분되고 있다는 불신은 세상을 향한 무관심이 되었고, 급기야 모든 결과의 책임을 개인의 선택으로 돌리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런 세태가 결코 바람직하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기성세대가 이와 같은 불신과 분노, 박탈감 등의 감정은 읽으려 하지 않고 그저 누칼협이라는 단어를 ‘청년들의 극단적인 개인주의’로만 치부한다면 개선의 여지가 사라지는 것 또한 사실이다. 부조리한 원칙들이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한, 청년들은 냉소를 거두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