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A4의 역사
중국의 위대한 발명품 중 으뜸이 종이다. 종이는 인쇄술, 문자와 함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인간의 경험이나 생각, 감정을 다른 사람, 후세와 나눌 수 있어 인류 문명사에 혁명을 가져왔다. 현재 사용되는 종이 제조 방식을 개발한 사람은 중국 후한 시대 환관 채륜으로 알려져 있다. 채륜은 105년 삼·아마 등에서 섬유를 분리한 뒤 얇은 막상으로 걸러서 떠내어 종이를 만들었다. 채륜 이전에도 종이는 사용됐다. 고고학적으로는 중국 서북부 간쑤성에서 BC8세기경으로 추정되는 종이가 발견됐다.
이렇게 탄생한 종이는 대량 생산되면서 저렴한 가격에 널리 보급될 수 있었다. 채륜 사후인 중국 서진 시대(300년경)에는 ‘위·촉·오’ 세 국가 도읍지를 묘사한 베스트셀러 책이 유명해지자 당시 낙양의 지식인들이 앞다투어 필사본을 구하느라 ‘낙양의 지가를 올리다’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종이는 인기 제품이었다. 현재도 종이는 신문지부터 책과 공책, A4 용지, 화장지와 지폐, 잡지, 쇼핑백, 달력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활용된다.
중국이 세계 최초로 발명한 종이가 최근에는 중국의 역사를 뒤바꿀 용도로 사용되는 모양새다. 2020년 7월에는 홍콩보안법 발효로 표현의 자유를 강탈당한 홍콩 시민들이 최후의 저항 수단으로 A4 백지를 들고, 시위를 벌였다. 반중 구호가 적힌 피켓만 들어도 처벌받았기 때문이다. 2년여가 흐른 지금 세계 최초의 종이가 발견된 감쑤성 바로 인접한 신장웨이우얼자치구에서 화재로 10명이 목숨을 잃는 일이 발생하면서 A4 백지를 든 제로 코로나 반대 시위가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중국 정부의 코로나 봉쇄 정책으로 아파트가 봉쇄돼 피해를 키웠다는 소문이 빠르게 확산됐기 때문이다.
A4 백지 혁명은 ‘제로 코로나 종식’에서부터 ‘공산당은 물러나라. 독재자 시진핑은 물러나라’고 요구하는 반정부 시위로 급속히 확산하는 양상이다. 중국 정부가 백지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공안경찰과 최루탄, 디지털 감시 체계까지 동원하고 있지만, 한 가지 사실은 분명하다. 시위대가 들고 있는 A4 백지는 아무리 접어도 처음의 비율이 그대로 유지된다는 점이다. 여러 장의 문서를 모아찍기 해도 비율이 유지된 채 여러 장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것도 이 덕분이다. 폭력으로 국민을 굴복시키려 해도 민심은 쉽게 꺾이지도 변형되지도 않는다는 진실을 유념해야 한다. 그게 종이와 함께해 온 인류의 역사이다.
이병철 논설위원 peter@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