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MA 컬렉션, 미술관 보고(寶庫) 들여다보기] 196. 그럼에도 기억하기, 크리스티앙 볼탕스키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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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슈비츠 이후 시를 쓰는 것은 야만적이다.” 테오도어 아도르노가 1949년의 논문에서 한 금언이다. 이 진술은 사실 예술의 금지라기보다 ‘트라우마 장사’에 예술이 함몰되는 것에 대한 경고이지만, 여전히 파국에 접근하는 예술의 주변을 강력하게 맴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에게 ‘홀로코스트 작가’로 잘 알려진 유대계 프랑스인 작가 크리스티앙 볼탕스키에 대한 눈초리도 상당히 엇갈려왔다. 홀로코스트를 일개 예술가가 작품의 소재로 삼는 것이 윤리적으로 위험하지 않은가? 심지어 볼탕스키는 2차 대전을 겪지 않은 전후세대로서, 홀로코스트와 맺는 관계는 간접적일 수밖에 없다. 그런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볼탕스키는 1987년까지 자신의 작업에서 홀로코스트와의 연관성을 부인하기도 했다. “나는 결코 수용소의 사진을 사용해 본 적이 없다. 내 작품은 홀로코스트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그 이후에 관한 것이다.”

전쟁을 직접적으로 겪지 않은 세대가 전쟁을 어떻게 ‘제대로’ 기억할 수 있을까?

볼탕스키의 1986년 작품 ‘기념비’는 전후세대의 특징적 태도를 보여준다. 볼탕스키는 수집한 초상사진을 재촬영해서 걸고, 이를 작은 백열등과 주석 액자 틀로 감싸 마치 재단을 떠올리는 형태로 배열했다. 디테일이 뭉개져 언뜻 보면 시체에 가까워 보이는 사진, 그 주변을 밝히는 전구와 녹슨 상자. 이는 자동적으로 ‘이미 없는 사람’에 대한 그리움, 슬픔, 공포 등의 감정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사진의 출처는 분명하지 않다. 우리는 작품의 형상을 보고 직관적으로 죽음을 떠올리지만, 볼탕스키가 자신의 작업에서 참조하는 대상은 대개 찢겨있고 불명확하고 변형되어 있다. 심지어 상당 부분 거짓이다. 죽었다고 생각한 초상사진의 주인공이 멀쩡히 잘 살아 노년을 즐기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다면, 우리는 안도해야 할까 혹은 실망해야 할까? 우리가 그의 작품 앞에서 느낀 그 깊은 울림도 거짓일까?

되찾을 수 없는 상실된 대상일수록 끊임없이 다른 형태로 재출현하는 법이다. 볼탕스키는 객관적 사실을 제시하지 않는다. 다만 트라우마가 남긴 회복할 수 없는 균열,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억하기’의 필요에 대해 요구한다.

안대웅 부산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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