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고블린 모드

강윤경 기자 kyk93@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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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

‘베짱이 모드’나 ‘도깨비 모드’ 정도로 번역되는 ‘고블린 모드’(goblin mode)는 사회적 규범을 거부하며 뻔뻔하고 제멋대로 구는 태도를 뜻하는 신조어다. 고블린은 잉글랜드 신화 속 추한 난쟁이 모습을 한 심술궂은 정령이다. 현대 판타지 장르에서 괴물 종족 중 하나로 등장하는데 대개 덩치가 작고 약하지만 머릿수가 많으며 사악하게 그려진다. 온라인 게임에 몬스터로 등장하는 고블린도 이 판타지 장르에서 따온 것이다.

영국 옥스퍼드 영어 사전이 올해의 단어로 고블린 모드를 선정했다. 옥스퍼드는 코로나 방역 규제 완화 이후 일상 회귀를 원하지 않는 사람들을 표현하는 데 주로 사용되는 신조어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SNS에 전시되는 꾸며진 생활상에 대한 피로감과 거부감에서 비롯된 태도로도 언급된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새벽 2시에 일어나 긴 티셔츠만 입고 부엌에 들어가 이상한 간식을 만드는 행동’으로 묘사했다. 우리에게 좀 낯선 표현이기는 한데 잘 꾸며 남들에게 드러내는 자신의 모습이 더 이상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자각에서 비롯된 ‘의도된 방종’ 정도로 읽힌다.

옥스퍼드에 따르면 이 말은 2009년 트위터에 처음 등장했는데 올해 초 한 트위터 사용자가 ‘미국 유명 래퍼 카니예 웨스트는 전 여자 친구인 배우 줄리아 폭스가 고블린 모드에 들어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헤어졌다’는 가짜 뉴스를 퍼트리면서 사용이 폭증했다. 옥스퍼드는 올해 처음으로 대중 투표를 통해 올해의 단어를 정했는데 가상 세계를 뜻하는 메타버스, 어떤 신념이나 행동을 지지한다는 해시태크로 사용된 #아이스탠드위드(IStandWith)와 벌인 온라인 투표에서 93%의 압도적 득표로 선정됐다.

올해의 단어가 한 해의 시대상을 반영하는 키워드라고 한다면 2022년은 코로나 팬데믹에 우크라이나 전쟁, 인플레이션, 경기침체까지 맞물려 암울한 말들이 지배한 한 해였다. 앞서 미국 유명 사전 출판사 미리엄웹스터는 ‘가스라이팅’을 올해의 단어로 선정했는데 가짜 뉴스와 음모론이 판치는 사회상을 반영했다고 설명했다. 영국 콜린스 사전이 선정한 올해의 단어는 ‘permacrisis’(영구적 위기)다. ‘permanent’(영구적인)와 ‘crisis’(위기)를 합성한 신조어다. 2023년에는 지금보다 더 거대한 먹구름이 몰려온다는데 어떤 독한 말들이 등장할지 벌써 걱정이다. 내년 한 해의 끝자락에서는 좀 유쾌하고 희망적인 올해의 단어를 만났으면 하는 바람이다.


강윤경 기자 kyk93@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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