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의 시선] ‘질적 도약’ 앞에 선 한국 축구
벤투호의 유산 살리되 ‘K사커’ 새로운 색깔 입혀야
빠른 움직임 통한 전방위 압박
어떤 강호 만나도 흔들리지 않아
한국팀 ‘빌드업’ 가능성 확인
외신들도 “가장 기대되는 팀”
축구 DNA 바꾼 벤투호의 성취
미래 발전 자산으로 흡수하고
유소년·K리그 활성화 끌어내야
학연·지연 고질적 폐해도 해소
역습·스피드 등 한국 강점 접목
장기적 안목 ‘원대한 그림’ 그릴 때
카타르 월드컵이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다. 2022년은 한국 축구가 의미 있는 결실을 거둔 해로 기억될 것이다. 여기서의 ‘의미’는 12년 만의 16강 진출이라는 외형적 성적에 한정되지 않는다. 강호들을 상대로 ‘빌드업’의 가능성을 엿보았고, 이를 통해 어떤 팀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기본 틀을 구축했다는 무형의 성취 또한 소중하다. 한국 축구는 이전과는 다른 수준의 질적 도약 앞에 선 것이다. 이제 월드컵을 준비하고 치르면서 겪은 일들을 냉정히 돌아볼 때다. 잘한 것은 이어 가고 부족한 것은 보완해야 더 나은 미래가 있는 법이다.
조별리그 32개국 경기 살펴보니
한국의 이번 16강 진출은 그 어느 나라보다 드라마틱했다. 해외 유명 스포츠 매체들도 한국팀의 경쟁력을 높이 샀다. “엄청난 부담에도 열세를 극복하고 (포르투갈이라는) 유럽의 거인을 꺾었다.”(ESPN) 그래서 한국은 다음 월드컵에서 가장 ‘멀리’ 갈 팀 중 하나로 당당히 평가받는다. 어린 선수들의 부각, 해외 진출에 대한 기대감, 여기에 더해 더 많은 ‘보석’의 발굴까지 겹친다면 장래가 밝다는 전망이다.
이번 월드컵의 한국 플레이를 분석한 결과가 있다. 글로벌 축구 통계 업체 ‘옵타’와 국제축구연맹(FIFA) 매치 리포트를 근거로 조별리그 결과를 들여다본 수치다. 한국 축구의 약점이 현저히 개선되고 있지만 여전히 한계를 지니고 있음을 가감 없이 보여 준다.
한국은 상대 진영에서의 볼 탈취 부문에서 독일에 이어 잉글랜드와 함께 공동 2위를 기록했다. 전방 압박이 위협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42개 슈팅으로 4골을 만들었으니 슈팅 수 대비 성공률은 9.5%로 낮았다. 패스 성공률은 81.5%(15위)로 나쁘지 않았으나 여전히 롱패스 비율이 14.9%(9위)에 달할 정도로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페널티 구역 안으로 공을 배달하는 크로스의 의존도도 78%(4위)로 아주 높았으나 이에 비해 성공률은 30.5%(7위)에 그쳤다.
반면, 상대가 볼을 갖고 공격할 때 10차례 이상 패스를 허용하면서 페널티 구역 안으로 패스 또는 슈팅까지 내준 경우는 9회로 공동 6위였다. 상대 공격을 끊는 수비에 취약했다는 의미다. 16강 진출이라는 성적 속에서도 공수에서의 이런 취약점들은 보완해야 할 부분이 아닐 수 없다. 한편, 게임당 실책은 32개국 중 가장 적은 53.7개로 고무적인 기록을 보였다.
한국 축구 가능성 높인 벤투호
파울루 벤투 감독이 일군 가장 큰 성과는 한국 축구의 체질을 바꿨다는 데 있다. 강호들을 만나면 움츠러들어 수비하기에 바빴고 공격 땐 ‘뻥 축구’에 의존했던 한국은 이제 어떤 상대를 만나든 밀리지 않고 준비했던 플레이를 구사할 줄 알게 됐다. 벤투가 한국 축구의 장단점을 면밀히 파악하고 우리만의 색깔을 입히는 데 정성을 다한 결과다. 이는 세밀한 패스를 기반으로 한 후방 빌드업, 빠른 움직임을 통한 전방위 압박으로 요약된다. 변화가 하루아침에 이뤄질 리 없고 당장의 성과가 없으면 비판과 질책에 시달려야 하는 감독 입장에서는 이런 일관적인 담금질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성과는 이번 월드컵 본선에서 입증됐다. 빌드업을 통한 능동적, 공격적 플레이는 축구 강호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았다. 후방부터 파이널 서드(상대 골문에서 40m 공간)까지 세밀한 직조를 통해 경기를 주도하는 현대적인 축구로 한 단계 발전한 것이다.
지도자로서 벤투 감독의 역할도 긍정적 평가가 가능하다. 벤투는 무엇보다 선수 보호에 최선을 다했다. 선수 부상이나 컨디션 관리에 집중했고, 언론에 비판받는 선수들은 기자회견을 자청해 감쌌다. 경기에 패했을 때도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면서 선수 탓을 하지 않았다. 용병술은 일부 비판을 듣기도 했지만 편견 없이 선수들을 발굴하고 기용했다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벤투호는 월드컵을 위해 4년 세월을 한 감독에게 맡긴 한국축구사 최초의 결실로 기록될 만하다.
K리그 활성화와 함께 가야
지금은 한국 축구의 새로운 중흥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지는 시점이지만 한국 프로축구 K리그의 활성화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K리그는 말 그대로 한국 축구의 뿌리다. 내년이면 개막 40주년을 맞는 K리그는 아시아축구연맹 챔피언스리그 최다 우승 타이틀을 거머쥔 맹주다. 이번 월드컵에서도 한국의 5득점 중 4골을 ‘K리거’가 넣었다.
아쉽게도 K리그의 인기는 일본과 비교하면 한참 떨어진다. 일본 J리그의 평균 관중은 우리의 4배 수준이다. 무엇보다 일본 정부의 과감한 투자가 부럽다. 일본은 독일에 거점센터를 만들어 해외파 배출과 효율적인 관리에 진력한다. 이번 월드컵에서 일본 최종 엔트리 26명 중 19명이 유럽파였다. 일본축구협회가 유럽의 큰물에서 놀 수 있도록 통 큰 지원을 한다는 얘기다. 물론 유럽파가 능사는 아니겠지만 한층 강한 상대들과 부딪쳐 경쟁하고 국제적 흐름을 파악해야 성장할 수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일본은 ‘2050년 축구 선수 1000만 명 확보 및 월드컵 우승’이라는 원대한 프로젝트를 세웠다. 우리도 장기적 안목에서 한국 축구의 새로운 중흥을 위한 마스터플랜을 짜야 한다. K리그에 대한 관심에 더해서 인프라와 유소년에 대한 과감한 투자가 여기에 포함된다.
긴 호흡으로 풀어 갈 숙제들
월드컵에서 한 번 효과를 거두는 것과 이를 유지하면서 더 높은 차원으로 끌고 가는 것은 다른 문제다. 벤투가 강조한 빌드업은 소기의 성과를 거뒀지만 이번 월드컵에서 득점으로 이어지는 결과는 없었다. 점유율에 기반한 축구 철학에 대해 객관적인 평가의 시간을 충분히 가질 필요가 있다. 전문가들도 대체로 “벤투의 유산을 최대한 살리되 압박과 역습, 스피드 등의 한국 특유의 강점을 접목해 나가는 일이 중요하다”는 목소리다.
벤투호의 완주는 축구협회의 믿음과 지원으로 가능했다고 본다. 그동안 월드컵마다 반복되던 감독 교체의 악순환에서 벗어났고 여러 차례의 위기와 비난 앞에서도 흔들림 없는 믿음으로 4년간의 동행에 성공했다는 자체가 기념비적이다. 그러나 더 높은 도약을 위해, 도약의 동력을 얻기 위해 해결해야 할 숙제도 적지 않다.
벤투 감독이 지난 7일 대표팀을 떠나면서 이런 말을 했다. “그라운드 안에서 일어나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라운드 밖에서의 준비나 지원도 중요하다.” 지난달 10일 카타르를 떠나기 전 기자회견의 발언은 한층 직설적이었다. “(한국에서) 선수 휴식은 필요 없고 중요한 건 돈, 스폰서 이런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요지인즉슨, 선수들의 혹사에 대한 우려였다.
이는 막판에 불거진 ‘2701호 사태’와도 무관치 않다. 그것은 개인 트레이너들과 대표팀 정식 의무팀과의 갈등을 상징하는 공간이다. 2701호의 깊은 속사정을 알 길은 없지만 학연과 지연, 혈연처럼 연줄이 작동하는 시스템은 더 이상 바람직하지 않다. 축구협회의 참된 역할은 이런저런 쓴소리와 공정성 시비 등을 해소하는 데 있다. 이런 노력들이 모이고 모여 한국 축구의 미래가 '빌드업'된다.
김건수 논설위원 kswoo333@busan.com
김건수 논설위원 kswoo333@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