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 퀴리’말고도 위대한 여성 과학자 많았다
사이언스 허스토리/애나 리저·레일라 맥닐
천문대 계산원 플레밍, 변광성 발견
고고학자 누탈, 서구 왜곡기록 정정
고대~20세기 여성과학자들 조명
남성 중심 편견으로 인한 장막 걷어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과학에서 여성에 관한 기록은 찾기 어렵다. 고대에는 어떤 종류의 기록도 찾기 힘들다. 그런데도 자연계를 세심하게 연구해온 몇몇 여성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다.
초기의 기록은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사이 메소포타미아의 도시국가에서 찾아볼 수 있다. 기록이 남아 있는 최초의 여성 저자는 엔헤두안나(기원전 2285~2250년)이다. 그는 고대 도시 우르의 사르곤 왕의 딸이자 시인이며 대제사장이었다. 1920년대 고고학자들이 우르의 유적을 발굴하면서 엔헤두안나에 대한 기록을 처음 발견했다. 돌로 된 원판의 한쪽 면에는 정교한 의상을 입은 여성이 남성을 거느리고 사각형의 계단식 건조물인 지구라트의 제단에서 의식을 관장하는 모습이 돋을새김으로 새겨져 있었다. 원판의 반대면 가운데에는 달의 신 난나의 여제사장을 묘사하는 글도 나온다. 엔헤두안나의 기록은 고대 수메르 문학과 문화를 연구하는 중요한 자료가 되었으며, 초기 인류사에서 여성이 천문 관측에 참여했음을 보여준다.
고대의 여성 과학자 중에 가장 유명한 이는 4세기 그리스의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히파티아(335~405년 추정)이다. 하지만 역사가들은 그리스 학술 체계 연구와 여러 사람의 저술을 통해 히파티아의 일생에 대한 기록을 찾아냈다. 히파티아의 아버지는 수학자이자 천문학자 테온이었다. 그는 아버지가 수장으로 있던 알렉산드리아 학당에서 교육받은 것으로 추정되며 30대에 알렉산드리아 신플라톤 학파의 지도자가 되었다.
이처럼 고대부터 오늘날까지 여성은 과학이 발전하는 데 절대적인 존재였다. 그런데 역사 속에서 여성 과학자에 대한 기록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녀들의 이야기는커녕 그 수가 얼마나 되는지조차 알 수 없다. 왜일까? 오랜 세월 과학계의 편협한 속성과 남성 중심의 편견이 여성 과학자의 이야기를 외면하고, 왜곡하고, 억압하고, 감추었기 때문이다.
〈사이언스 허스토리〉는 고대부터 20세기까지 왜곡된 역사를 바로 세우고 과학 속 여성들의 매혹적인 이야기를 세세히 기록했다. 책에는 우리가 몰랐던 다채롭고 흥미진진한 여성 과학자 이야기가 가득하다. 과학 전문 작가인 저자들은 마리 퀴리나 로절린드 프랭클린 같은 친숙한 이름을 넘어 과학에서 숨겨진 여성의 역사를 알려준다. 그들은 전 세계 천문대에서 하늘을 그린 여성 계산원, 조국의 원주민을 이해하려고 노력한 고고학자, 새로운 학문을 세워 과학의 얼굴을 바꾼 선구자들이었다.
1880년부터 1930년까지 파리, 희망봉, 헬싱키, 그리니치, 옥스포드, 하버드 등 세계 곳곳의 천문대에서 여성 계산원 수백 명이 고군분투했다. 계산원들은 천문대의 방 안에 틀어박혀 매일 밤하늘을 찍은 사진 유리판들을 들여다보며 별의 위치를 계산하고 별 사이의 거리와 밝기를 측정했다. 하버드 천문대에서 원래 필사와 기초적인 계산만 맡았던 플레밍은 10개의 신성과 300개가 넘는 변광성(광도가 변하는 별), 59개의 성운을 발견했다. 천문대에서 처음으로 항성 스펙트럼 분류체계를 만들기도 했다. 1959년까지 여성들은 현재까지 알려진 1만 4708개의 변광성 중 75% 이상을 발견했다. 당시 남성 천문학자들에 종속된 지위에서도 여성들은 혁신적이고 비상한 일을 해냈다.
20세기 초까지 고고학은 구미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의 산물이었다. 서구 국가들은 폐허가 된 원주민 유적과 유물, 기념물을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면서 세계에 제국주의의 힘을 널리 알렸다. 유럽과 미국의 고고학자들은 유적과 유물을 수집하면서 사람에 관한 이야기와 과거 문화에 대한 지식도 통제했다. 멕시코계 미국인 고고학자 겸 인류학자 젤리아 누탈은 1897년 ‘고대 멕시코의 미신’이란 논문에서 ‘스페인 작가들이 원주민 문명을 잔인하게 말살한 것을 정당화하려고 아스텍의 종교 의식을 심하게 과장했다’고 주장했다. 누탈은 고대 멕시코의 고고학적 기록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했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엘미는 식물학 입문서 ‘아기 새싹들’을 펴냈는데 아이들에게 인간의 성을 가르치는 내용을 담았다.
여성 과학자들은 제도적 장벽뿐 아니라 일상의 성차별과 괴롭힘, 학대, 폭력에 부딪히면서도 노력을 멈추지 않고 난관을 헤쳐 나오며 오늘날 현대 과학을 우뚝 서게 했다. 과학의 역사에서 ‘최초’라는 타이틀을 단 여성 과학자들도 여럿 있다.
미국 천문학자 베라 루빈(1928~2016)은 은하 회전 연구를 통해 우주의 주요 구성 요소인 암흑물질에 대한 최초의 증거를 제공했다. 북아일랜드 출신인 조슬린 버넬은 빠르게 회전하는 별인 펄서를 1967년 최초로 발견해 천문학의 중요한 돌파구를 열었다. 이처럼 역사와 과학이 감추어 둔 여성 과학자 이야기를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애나 리저·레일라 맥닐 지음/구정은·이지선 옮김/학고재/360쪽/2만 원.
김상훈 기자 neato@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