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아쉬운 작별
‘카사블랑카’(1942)는 영화사에서 끊임없이 회자되는 고전이다. 대의를 위해 사랑을 포기한다는 통속적 내용인데도 눈을 뗄 수가 없다. 진정한 사랑을 위한 아름다운 거짓말? 이 역시 진부한 얘기지만 가슴을 뒤흔든다. 많은 이들이 마지막 이별 장면을 잊지 못한다. 삐딱한 중절모를 쓴 험프리 보가트의 담담한 표정과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듯한 잉그리드 버그먼의 눈망울, 그 대비가 얼마나 사무치던지. 공항 활주로의 짙은 안개가 지울 수 없는 마지막 명장면을 완성한다. 영화는 지난 10월 한국에서 재개봉했다.
카사블랑카는 대서양에 연한 북부 아프리카 모로코의 제1 항구도시이자 휴양지다. 전란 때 미국으로 대피하려는 사람들의 기항지로 붐빈 곳이다. 영화는 물론 팝송으로도 너무나 유명해서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카사블랑카에는 모로코에서 가장 큰 종교건물인 하산 2세 모스크도 있다. 아랍 영향권이란 얘기다.
역사를 더 거슬러 오르면, 중세 시대의 위대한 탐험가 이븐 바투타가 바로 모로코 출신이다. 당대의 마르코 폴로처럼 장대한 세계 일주를 펼친 인물이다. 스물한 살 나이에 여행을 시작해 30년간 아시아와 유럽, 아프리카 3대륙에 걸쳐 10만km를 종횡무진했다. 그렇게 남긴 걸출한 〈여행기〉란 기실 그 무수한 ‘이별’의 기록임을 뜻한다. 한국 역사학자 정수일이 원문을 한국어로 번역해 화제가 된 때가 2001년이다. 아랍어 원본 완역은 프랑스어에 이은 세계 두 번째 업적이었다.
모로코는 포르투갈과 스페인, 프랑스로부터 식민 지배를 받은 아픔이 있다. 포르투갈은 15~18세기 3세기 동안 모로코의 일부 도시를 점령한 나라다. 스페인과 프랑스는 1912~1956년 모로코를 분할 통치했다. 이번 월드컵에서 모로코는 공교롭게도 이들 세 나라와 잇따라 맞붙었다. 스페인·포르투갈은 제압했지만 4강전에서 아쉽게 프랑스에 졌다. 하지만 아프리카 사상 첫 월드컵 4강 진출이라는 위업을 달성했다.
결승전과 3·4위전만 남은 카타르 월드컵도 이제 막바지를 향해 간다. 이별은 언제나 그렇듯 아쉬운 법이다. ‘카사블랑카’의 마지막 장면이 영화 팬들의 망막에 각인되었듯, 2022년 월드컵을 수놓은 영욕의 순간도 역사에 다 기록될 것이다. 영화에서 험프리 보가트는 눈물 그렁한 잉그리드 버그먼에게 비장한 이별사를 무심히 날린다. “이렇게 당신을 지켜보고 있잖아.” 또다시, 이 대사의 위로를 받아야 할 시간이다.
김건수 논설위원 kswoo333@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