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희와 함께 읽는 우리 시대 문화풍경] 첫눈과 설원의 대지
부산대 대학원 예술·문화와 영상매체협동과정 강사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슬픔의 날을 참고 견디면/ 즐거운 날이 찾아오리니.’ 고단한 일상을 달래주던 러시아 국민시인 푸시킨의 시다. 그때는 미처 몰랐다. 삶이란 나이와 상관없이 이렇게 내내 속이는 날들의 연속이라는 것을. 러시아의 한 유학생이 지도교수에게 인생이 고달프다 하소연했다. 답변은 이랬다. “자네, 인생이 왜 힘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그랬다. 슬픔의 날도 삶의 한 자락이거늘 왜 그토록 슬픔을 밀어내려고 했을까.
엊그제 금정산 자락에 눈이 내렸다. 첫눈이다. 오랜 기다림과 설렘 속에 도착한 연서와 같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는데도, 백석이 길어 올린 눈이 푹푹 나리는 겨울밤을 그리며 러시아 작곡가 스비리도프의 음악을 떠올렸다. 푸시킨의 단편소설 〈눈보라〉에 붙인 곡이다. 영화음악으로 작곡했다가 나중에 모음곡으로 발표했다. 널리 알려진 ‘올드 로망스’는 바이올린과 첼로의 애잔한 선율로 시작하여 트럼펫이 이어받으면 동토의 심장을 울리는 깊은 비장함으로 치닫는다. 현악기가 빚어내는 하강 선율은 휘몰아치는 눈보라 속으로 이끈다.
〈눈보라〉는 폭설로 엇갈린 운명을 살아가야 했던 세 사람의 사랑 이야기다. 귀족 아가씨 마리야와 가난한 장교 블라디미르는 부모의 동의 없이 비밀 결혼식을 올리기 위해 사랑의 도피를 감행하지만 실패하고 만다. 그칠 줄 모르고 휘몰아친 눈보라 때문에 블라디미르가 약속 장소에 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먼 훗날 홀로 사는 마리야 앞에 나타난 부르민 대령은 그 옛날 눈보라를 피해 도착한 교회에서 신랑으로 오인되어 어느 여인과 결혼식을 올린 적이 있었노라 고백한다. 그 신부가 다름 아닌 마리야였던 것이다. 얄궂은 운명의 장난 속에서 사랑은 눈보라처럼 어지럽게 흩어졌다. 삶 또한 무엇이 다를까.
영원할 것 같았던 낭만적 사랑의 파탄이나 뜻하지 않았던 결혼식은 눈보라 때문이었을까. 새해 들어 창대하게 세웠던 계획을 미처 이루지 못한 일이나 때론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는 일을 하게 되는 것도 삶에 불어닥친 눈보라 때문이 아니었을까. 한 해가 이렇게 저물어간다. 올해도 무수한 눈보라를 만났다. 삶의 창을 흔드는 바람 소리는 얼마나 두려웠던가. 예측하지 못한 눈보라에 무릎이 꺾이던 날들은 또 얼마나 잦았던가. 삶이란 내내 눈보라와 맞서는 일이다. 눈보라가 잦아들고 나면 꿈결처럼 흰 눈 가득한 평온한 대지를 마주한다. 키를 잴 수 없는 높이로 쌓인 눈밭 속에 아픔도, 슬픔도, 분노도, 아쉬움도 묻어버리고 설원의 대지를 뚜벅뚜벅 다시 걸어가야 하는 것이 삶이 아니던가.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마음은 미래에 살고/ 현재는 언제나 괴로운 법/ 모든 것은 덧없이 사라지고/ 지나간 것은 다시 그리워지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