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천천히 걷는다는 것의 의미
김남석 문학평론가
20년 전 올레 유행 뒤 다양한 길 생겨
자동차 중심 관광·여행 패턴 탈피
느리게 움직이고 천천히 보는 ‘걷기’
효율 이면에 숨은 느릿한 정취 선사
2022년을 마무리하는 지금
걷는 길 위에서 노을 한 번 보길
요즘은 길에서 일부러 걷고 있는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20년 전 올레가 유행하면서 전국 곳곳에 걸을 수 있는 길이 만들어지면서 이러한 움직임은 더욱 늘어났다. 일상에서 걷고자 하는 이들이 늘자, 그들의 걷는 속도에 맞추어 관광 방식마저 변화하였고, 관광지뿐만 아니라 도시 곳곳까지 걷기 좋은 길이 확산되기에 이른 것이다. 지금은 길들의 명칭도 다양해서 둘레길, 해파랑길, 소리길, 해안길 등 지역의 특색과 개성을 살린 이름이 곳곳에 붙어 있다.
20년 이전의 세상과 비교하면, 현재 상황은 놀랍지 않을 수 없다. 많은 이들이 차를 갖기 위하여 집중할 때가 있었다. 지금도 한국 사회에서 자가용은 부의 척도이지만, 어느 한때는 스스로 중산층에 들기 위하여 집집마다 차를 구입하고 그 차를 세상에 보여야 한다고 생각한 때가 있었다. 그때는 관광과 여행의 중심을 차가 차지하고 있었다. 차를 타고 세상을 돌고자 했고, 차도를 따라 관광지를 찾는 데에 열중했다.
지금도 여전히 자동차 보급이 늘고 있고 여행을 떠날 때 차를 이용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차는 중장거리 이동용이고 정밀한 관광은 눈으로 하고자 하는 이들도 역시 늘었다. 그러한 이들은 오래된 골목길을 걷고, 자연과 어우러진 길을 일부러 탐험한다. 먼 길을 걷기 위하여 혹은 산길을 타기 위하여 며칠에 걸쳐 계획을 세우기도 하고, 인생의 목표 중 하나로 이러한 길들을 연속적으로 방문하는 일을 수립하기도 한다. 느리게 움직이고 천천히 보게 하는 걷기가, 삶의 다른 차원을 열어주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변화된 삶에 맞게 다른 것들도 변화하기 시작했다. 가령 공원을 만들어 운동과 산책을 장려하는 도시 정책이 우대받고 있고, 반려견과 함께 걸을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려는 시도도 나타나고 있다. 그러자 그 길과 공원의 곳곳에서 정자와 쉼터가 지어지고 있다. 본래 그 자리에 토성이 있거나 읍성이 있으며 그곳은 성곽의 길이 될 것이고, 그 도중에 오래된 누정이 있었으면 새로운 관망지를 얻은 조망의 길이 될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길과 여행과 사람과 자연을 전체로 묶는 인식의 새로운 지평에도 도움을 줄 것이다.
이처럼 2000년대 우리는 천천히 걷거나 자기 힘으로 움직이면서 주위를 다른 눈으로 보는 방식에 제대로 터득하기 시작했다. 스스로 움직이는 즐거움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빠르고 효율적인 삶의 이면에 숨어 있는 느릿한 정취도 찾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더 신속하게 모든 것을 시행해야 하는 업무 시간과 노동의 직분을 완화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무엇이 먼저인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삶의 이러한 변화는 우리가 추구하는 삶의 방향에 대한 사색과 무관하지 않다. 현실에서 우리는 여전히 바쁘고 효율적으로 시간을 쪼개 써야 하지만, 그렇게 간직된 시간을 자신만의 길 위에 온전히 쏟아붓는 가치와 기쁨과 자기 확인에 대해 부끄러워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길을 걷다가 작은 정자를 발견하고 그 이름에 놀란 기억이 난다. “**노을정” 그곳은 노을이 아마도 예쁜 곳일 거다. 아직 그곳에서 노을을 볼 여유는 만들지 못했지만, 해당 지명에 한글 ‘노을’을 결합하여 이러한 이름을 만든 변화는 저절로 생각을 멈추게 한다. 앞으로도 그곳에서 노을을 보기 위해서 적지 않은 시간을 모아야 하겠지만, 1년을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우리가 걷고 있는 길 위에서 노을을 한 번쯤 보아도 좋지 않을까 싶다. 자기의 길을 걸어 1년을 마무리한 사람이라면…, 아마도 시간이 길이라면 그 시간은 천천히 흐르는 시간이 될 것이다. 2022년 한해도 정말 수고 많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