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속 동물, 인간 감정 대변하는 조역”
최석운 개인전 ‘나의 개와 고양이’
31일까지 갤러리호박 개관 초대전
1980년대 ‘형상미술 작가’로 활약
웃음 뒤에 감춰진 생각 있는 그림
“안 보고 그린 것이 더 생명력 있어”
3년 전 작업실에 길고양이가 나타났다. 규칙적으로 사료를 놓으니 새끼 고양이를 한 마리씩 데려왔다. 그렇게 작업실 마당에 눌러앉은 고양이가 6마리. 나무로 된 집 하나, 추울까 봐 스티로폼을 개조한 집 하나, 그게 좁아 보여서 또 하나. 고양이 집은 세 채가 됐다. 최석운 작가와 길고양이 황순이 이야기다.
부산 해운대구 재송동에 문을 연 갤러리호박 개관 초대전으로 최석운 작가의 ‘나의 개와 고양이’가 31일까지 열리고 있다. 이번 전시는 경기도 양평에서 작업하는 작가가 부산에서 13년 만에 가지는 개인전이다. 최 작가는 부산대 미대와 홍익대 미술대학원을 졸업했다. 그는 1980년대 부산에서 형상미술 주요 작가로 활동했다.
“대학에 갔는데, 내가 좋아서 그린 그림과 그려야 할 그림이 다르더군요.” 최 작가는 서양미술사 책을 덮고, 한국 그림의 근원을 찾아 나섰다. 조선 후기 풍속화 속 풍자와 해학이 그를 사로잡았다. “내 속으로 들어가야 답이 있다고 생각했죠. 가장 나다운 것, 나에 가까운 일상을 그렸어요.”
그는 학부 1학년 때 ‘제3작업실’이라는 전공 서클을 만들어 열심히 활동했다. “집과 학교가 아닌 곳에서 작품을 그려오라고 했죠. 두꺼운 책을 나눠 읽은 것을 발표하고, 서울의 좋은 전시를 촬영해서 환등기를 비추며 밤새워 토론했어요.” 부산대와 옛 사대부고 사이 철망에 그림을 걸고, 동래산성에서도 전시를 가졌다.
“광복동 사인화랑으로 기억해요. 엄마 손잡고 갤러리에 들어온 아이가 쥐와 바퀴벌레를 그린 제 그림을 보고 웃더군요.” 작업실에서 졸고 있는 작가의 몸을 타고 기어오른 바퀴벌레. 최 작가는 경험에서 시작한 그림에 대한 반응에 집중했다. “모두 거대 담론을 쫓고 심각할 때 화가인 나 하나는 좀 웃겨보자. 이게 내가 그릴 그림이다 싶었죠.” 그렇게 웃음을 주는, 웃음 뒤에 감춰진 생각이 있는 그림이 나왔다.
‘나의 개와 고양이’전에서는 인간이 있을 자리를 비집고 들어온 동물, 인간을 대신한 동물을 보여준다. “작업실 근처에서 유모차에 개 세 마리가 실려서 오는 모습을 처음 봤을 때가 떠올라요. 처음에는 놀랐는데 지금은 (동물이) 한없이 외로운 인간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패밀리’가 되어있다고 생각해요.” 최 작가는 동물은 그대로 있는데, 인간이 변한 것이라고 했다.
최 작가는 그림 속 동물은 직접 보고 그린 것이 아니라고 했다. 심지어 개는 키우지도 않는다. 자세히 보니 인물 옆 강아지의 발 모양이 이상하다. “안 보고 그린 것이 더 생명력이 있어요. 안 보면 내 생각에 의지하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이상하게 나와요. 그림은 이상한 데서 시작하는 것이니까. 영화를 봐도 이상한 놈들이 인류를 구원하잖아요.”
작가는 오랫동안 곁눈질하는 사람들을 그리며, 남을 훔쳐보고 또 남을 의식하는 위선적 세태를 표현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사람 대신 동물들이 곁눈질하고 있다. 작가는 “그림 속 동물은 인간의 생각을 보조하는 조연들”이라고 설명했다. “1994년에 그린 ‘기다림’이라는 작품이 있어요. 슬레이트 지붕 위에 등을 돌리고 앉은 사람 옆에 개와 닭이 있어요. 개와 닭은 상극인데 개가 눈앞에 알짱거리는 닭을 신경도 안 쓸 정도로 지쳐 있어요. 얼마나 오래 기다렸는지를 보여주는 거죠.”
최 작가는 20대 때 그린 그림을 지금도 집에 걸어두고 있다고 했다. “나이가 들고 안정적 공간에 머물면 긴장감이 떨어져요. 레지던시 등으로 작업실을 옮기면 자극을 받아 ‘젊은 시절의 내’가 나와요. 내년에도 3개월 정도 다른 공간에 레지던시 입주를 계획하고 있어요. 어떤 그림이 나올지 기대가 되네요.”
오금아 기자 chris@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