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는 재미, 기다리는 설렘…전통주의 매력에 취하다

이대진 기자 djrhe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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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쁜 현대사회에 손수 술 빚는 사람들
인사 대신 내가 만든 술 건네며 교류
다양함과 기다림, 우리술만의 매력
술 소비 감소세 불구 전통주는 늘어

미리내협동조합에서 진행하는 '원데이 클래스'의 참가자들이 목에 넘기기 애석할 정도로 맛있다는 '석탄주(惜呑酒)'를 빚고 있다. 미리내협동조합에서 진행하는 '원데이 클래스'의 참가자들이 목에 넘기기 애석할 정도로 맛있다는 '석탄주(惜呑酒)'를 빚고 있다.

다사다난했던 올해가 저문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자리에 어김없이 우리 곁을 지키는 벗이 있으니, 새해엔 술술 풀리길 기원하며 마시는 ‘술’이다. 서민의 술 소주, 시원한 맥주, 향긋한 와인, 독한 위스키 등 ‘오늘은 어떤 주(酒)님과 함께할까’ 고민하는 애주가들. 헌데, ‘좋은 술 한 잔’을 위해 몇 주의 기다림을 감내하는 이들이 있다. 나와 가족이 마실 술이라며 직접 막걸리·약주·청주를 빚는 ‘자가양조’ 마니아들이다. 술이 익는 시간, 그 기다림마저 설렌다는 이들을 만나 알면 알수록 빠져드는 전통주의 세계를 체험해 봤다.

미리내협동조합 현관문을 열면 아름다운 유리잔과 다양한 술이 ‘주(酒)님’의 세계로 안내한다. 미리내협동조합 현관문을 열면 아름다운 유리잔과 다양한 술이 ‘주(酒)님’의 세계로 안내한다.
미리내협동조합의 한구석, 전통숙성용기인 '숙아리'에서 익어가고 있는 전통주들. 미리내협동조합의 한구석, 전통숙성용기인 '숙아리'에서 익어가고 있는 전통주들.

■인사 대신 술잔 건네는 사람들

지난 9일 부산 동구 초량동 화교소학교 바로 옆 건물. 2층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벽면 가득 예쁜 유리잔과 각양각색의 술병이 손님을 맞는다. “이거 방금 채주(採酒·다 익은 술을 거르는 작업)한 건데, 한 잔 드셔 보세요.” 테이블에 삼삼오오 모여 앉은 이들이 대뜸 술을 건넨다. 엉겁결에 술잔을 받아 들자 은은한 꽃향기가 피어오른다. 한 모금 입안으로 가져가자 독특한 풍미가 미각을 깨운다. 표정을 읽은 듯, 술 주인의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인사 대신 자신이 만든 술을 주고받는 이곳은 전통주 체험교육시설인 ‘미리내협동조합’. 이날은 마침 ‘원데이 클래스’ 참가자들을 대상으로 이론·실습 수업이 진행 중이었다. 이들이 도전할 술은 ‘도소주(屠蘇酒)’. 사악한 기운을 물리친다는 의미를 지닌 술로, 새해 첫날 온 가족이 건강을 기원하며 마시는 세시주다. 교육장에서 간단한 이론 교육을 마친 뒤 바로 옆 작업장으로 이동해 실습에 돌입한다. 푹 쪄낸 찹쌀 고두밥을 골고루 펴 식힌 뒤, 미리 담근 ‘밑술’과 섞어 정성스럽게 치대는 ‘덧술’ 작업이다.

바로 옆에선 ‘석탄주(惜呑酒)’ 빚기가 한창이다. 교육을 받은 뒤 전통주 매력에 빠져 본격적으로 자가양조에 나선 이들이다. 작업장 뒤편 발효실은 협동조합 회원들이 자가양조 중인 발효통으로 가득하다.

10년 전부터 전통주체험공방을 운영해 온 미리내협동조합 손승희 이사장은 “예전에는 막걸리 말고는 나머지 전통주를 생소해 했는데, ‘원소주’ 등으로 전통주 붐이 일면서 요즘에는 많이 대중화됐다”며 “며칠 전 20대 여성 5명을 대상으로 원데이 클래스를 진행했는데, 질문도 많고 굉장히 적극적이었다”고 말했다.

남녀노소 전통주에 대한 관심이 늘면서 미리내협동조합 시간표엔 교육과 자가양조 일정으로 빼곡하다. 올해에만 100차례 300여 명이 교육을 받았고, 교육 이후 조합 회원이 돼 자가양조에 나선 이들도 여럿이다.

부산 동구청 학습살롱의 하나로 최근 미리내협동조합 원데이 클래스에 참가한 20대 젊은이들이 술을 빚고 있다. 미리내협동조합 제공 부산 동구청 학습살롱의 하나로 최근 미리내협동조합 원데이 클래스에 참가한 20대 젊은이들이 술을 빚고 있다. 미리내협동조합 제공
미리내협동조합 '원데이 클래스' 참가자들이 손승희 이사장으로부터 전통주 이론 수업을 듣고 있다. 미리내협동조합 '원데이 클래스' 참가자들이 손승희 이사장으로부터 전통주 이론 수업을 듣고 있다.
미리내협동조합 '원데이 클래스'의 참가자들이 '도소주'를 빚고 있다. 미리내협동조합 '원데이 클래스'의 참가자들이 '도소주'를 빚고 있다.
도소주 빚기의 한 과정으로 밑술을 거름망에 넣어 짜는 작업. 도소주 빚기의 한 과정으로 밑술을 거름망에 넣어 짜는 작업.

■나와 가족, 고마운 이들을 위해

분초 단위로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 마트에 가면 맛있는 술이 즐비한 시대에 ‘나만의 술’을 빚는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자가양조에 빠진 이들은 하나같이 우리술만의 매력이 있다고 입을 모은다.

남편과 함께 자주 술잔을 기울인다는 박정임(46) 씨는 지난해 봄 미리내협동조합에서 애주(艾酒·쑥막걸리)를 만들어 본 게 계기가 돼 자가양조에 발을 들였다. 박 씨는 “좋은 재료로 술을 만들면 맛도 좋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쌀·물·누룩 등 술의 재료를 생각하며 빚고 있다”며 “특히 내 손맛이 들어간 술이다 보니 남편도 더 좋아하고 맛있어 한다”고 말했다.

마실 이를 생각하면, 술이 익는 시간이 소중하다. 올 5월 원데이 클래스에 참가하며 전통주에 입문한 김종남(62) 씨는 “구순이신 아버지의 10년 뒤를 위한 100세주, 7년 뒤 사돈 칠순 잔치 축하주 등 집안 대소사를 미리 준비하며 술 담글 계획을 세우고 있다”며 “술이 완성될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이 고마운 이들에 대해 돌아보는 시간인 셈”이라고 말했다. 올여름 친구 교사의 퇴임 선물로 직접 담근 술 20병을 선물한 김 씨는 돌아볼수록 고마운 이들이 많아 매주 2차례씩 술 빚는 양을 배로 늘렸다.

지인들을 생각하며 '석탄주'를 빚고 있는 김종남 씨. 지인들을 생각하며 '석탄주'를 빚고 있는 김종남 씨.
미리내협동조합 발효실에서 김 씨의 술을 비롯해 회원들이 직접 담근 다양한 우리술이 익어가고 있다. 미리내협동조합 발효실에서 김 씨의 술을 비롯해 회원들이 직접 담근 다양한 우리술이 익어가고 있다.

같은 술이지만 계절마다 맛과 향이 다른 점도 우리술의 특징이다. 자가양조를 위해 매달 한 번 이상 미리내를 찾는 김정랑(41) 씨는 “어떤 쌀, 어떤 누룩, 어떤 계절 재료를 쓰느냐에 따라 조금씩 술맛이 다르기 때문에 재미가 있다”며 “어떨 땐 내 손에서 어떻게 이런 술이 나왔는지 놀라기도 한다”고 말했다. 김 씨는 우리술에 맞는 우리 음식을 연구하기 위해 3년 전 한식당까지 차렸다. 식당 창고에 보관된 ‘김 씨표’ 술만 30종이 넘는다.

손 이사장은 “사케와 와인은 하나의 재료로 만들지만 우리술은 계절마다 다양한 재료를 쓰기 때문에 매번 흥미로워 계속 연구하게 된다”며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술을 찾아가는 재미도 있다”고 말했다. 손 이사장은 최근 고문헌 <양주방>에 등장하는 약주인 ‘석술’을 복원해, 곧 출시를 앞두고 있다.

취재를 겸해 기자도 전통주 만들기에 도전해 봤다. 한 번만 술빚기를 하는 단양주인 ‘소곡주’이다. 식힌 찹쌀 고두밥에 입국과 누룩, 물과 나머지 부재료를 넣고 잘 섞은 뒤 발효통에 담고 붉은 고추를 올리면 끝이다. 2~3주 뒤 완성될 술을 누구와 함께할까. 설렘 가득한 시선으로 발효통을 바라보게 된다.

기자가 직접 담근 '소곡주'. 부산일보 편집국 한구석에서 발효가 진행 중이다. 기자가 직접 담근 '소곡주'. 부산일보 편집국 한구석에서 발효가 진행 중이다.
손승희 이사장이 협동조합 발효실에 설치된 발효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손승희 이사장이 협동조합 발효실에 설치된 발효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술 소비 줄어도, 전통주는 증가세

가족이 마실 술을 집에서 빚는 건 우리나라의 전통이었다.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제사에 쓸 술이나 계절별로 마실 술을 각 가정에서 만들었다. 이 ‘가양주(家釀酒)’ 문화는 일제강점기 때 대형 양조장에서 만든 술을 제외한 나머지 술을 불법으로 단속하면서 사실상 사라졌다. 해방 이후에도 쌀 낭비 등을 이유로 가양주 제조는 계속 금지됐고, 쌀로 만든 막걸리는 1990년이 돼서야 허용됐다.

집집마다 다른 술맛을 지녔던 우리술의 전통은 2010년 ‘전통주 등의 산업진흥에 관한 법률’(전통주산업법)이 제정되면서 비로소 부활의 기반이 마련됐다. 지역 특산주와 소규모 주류 제조 면허 제도도 생기면서 지역마다 소규모로 전통주를 만들어 판매할 수 있게 됐다.

전통주에 대한 일반인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2012년부터 정부의 교육지원 사업도 진행 중이다. 양조장 운영자나 창업준비생을 위한 ‘전문인력 양성과정’(전국 6곳)과 전통주에 관심 있는 일반인을 위한 ‘교육훈련기관’(전국 19곳)이 지정·운영되고 있다. 부산·울산·경남 지역에선 신라대가 2013년 농축산식품부와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의 우리술 전문인력 양성기관으로 지정돼 10년간 200명이 넘는 수료생을 배출했다. 신라대 식품조리학과 이용수 교수는 “과거에는 취미로 배우는 분들이 많았다면, 요즘은 현업에 종사하거나 창업을 하려는 분들의 비중이 높아졌다”며 “올해는 수료생의 3분의 1이 20~30대 젊은이인데, 대부분 창업이나 주류기업 취업을 준비하는 이들”이라고 설명했다.

전통주에 대한 관심은 소비량에서도 확인된다. 국세통계포털 자료를 보면 우리나라 연간 주류 시장(출고금액 기준)은 2017년 9조 2437억 원에서 2021년 8조 8345억 원으로 전반적인 감소 추세지만, 같은 기간 전통주는 400억 원에서 941억 원으로 배 이상 증가했다.

전통주 전문가인 경기도농업기술원 이대형 박사는 “막걸리(탁주) 시장은 줄고 있지만 그 안에서도 일반 막걸리가 아닌 전통주(민속주·지역특산주) 막걸리는 증가 추세”라며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다양한 전통주를 선호하는 이들이 늘고 있기 때문에 전통주 시장은 계속 확대될 것으로 본다”고 전망했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 제공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 제공


이대진 기자 djrhe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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