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도시 부산’ 발전 가능성 확실…역량 있는 자막 번역가 양성해야”

이우영 기자 verdad@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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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서 ‘번역 수업’ 달시 파켓 교수

‘헤어질 결심’ 등 영화 번역 20년
“콘텐츠 풍년, 많은 전문가 필요
재능 살릴 제작 환경 만들어야”

달시 파켓 교수가 지난 12일 부산아시아영화학교 도서관에서 자신이 번역한 봉준호 감독 영화 ‘기생충(PARASITE)’ DVD를 보고 있다. 김종진 기자 kjj1761@ 달시 파켓 교수가 지난 12일 부산아시아영화학교 도서관에서 자신이 번역한 봉준호 감독 영화 ‘기생충(PARASITE)’ DVD를 보고 있다. 김종진 기자 kjj1761@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푸른 눈을 가진 그는 거듭 고민했다. 한국어 단어 하나도 신중히 골랐다. 영화평론가이자 번역가인 달시 파켓(50·Darcy Paquet)은 말도 최대한 적확하게 하려 했다.

영화 ‘살인의 추억’으로 시작한 한국 영화 번역. ‘기생충’에 ‘브로커’와 ‘헤어질 결심’까지 20년간 작업이 이어졌다. 박찬욱, 봉준호, 홍상수, 김지운 등 세계적 감독이 믿고 영어 자막을 맡겼다. ‘비상선언’ ‘모가디슈’ ‘택시운전사’ ‘곡성’ ‘암살’ 등 수많은 작품이 그의 손을 거쳤다.

달시 파켓이 번역한 박찬욱 감독 영화 ‘헤어질 결심’. 올해 칸 영화제 감독상과 부일영화상 최우수작품상을 받았다. CJ ENM 제공 달시 파켓이 번역한 박찬욱 감독 영화 ‘헤어질 결심’. 올해 칸 영화제 감독상과 부일영화상 최우수작품상을 받았다. CJ ENM 제공

한국 영화 세계화에 앞장선 그가 부산에서 번역 수업에 나섰다. 영화·영상 자막 번역 전문가 양성 교육을 20일까지 진행했다. 2017년부터 교수를 맡은 수영구 광안동 부산아시아영화학교에서 따로 수강생을 모집했다. 영화학교 도서관에서 지난 12일 그를 만나 이유를 물었다.

파켓 교수는 새로운 번역가가 많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OTT(온라인 동영상 서비스) 콘텐츠가 많아진 데다 해외 합작은 미리 시나리오 번역을 하는 경우도 있다”며 “자막 번역 전문회사를 차렸는데 4명으로도 부족하다”고 밝혔다. 이어 “충분한 시간을 갖고 감독과 여러 번역가가 체크할 수 있어야 좋은 번역이 가능하다”며 “부산에서 통역 경력자 등에게 자막 번역을 가르치게 된 이유”라고 말했다.



달시 파켓 교수와 자신이 번역한 ‘곡성’, ‘밀정’, ‘택시운전사’, ‘암수살인’ 등 영화 DVD들. 김종진 기자 kjj1761@ 달시 파켓 교수와 자신이 번역한 ‘곡성’, ‘밀정’, ‘택시운전사’, ‘암수살인’ 등 영화 DVD들. 김종진 기자 kjj1761@

좋은 번역은 관객이 편하게 이해하고, 상황과 연기에 어울려야 한다는 생각도 밝혔다. 그는 “‘타짜’ 대사에 ‘이대 나온 여자’는 어떤 학교인지 몰라도 의도를 쉽게 이해할 수 있어 ‘Ewha Womans Univ(이화여대)’로 번역했다”며 “‘기생충’에서 ‘서울대 문서위조학과’는 봉준호 감독이 최종 결정은 내렸지만, 관객이 바로 이해해야 웃을 수 있다는 생각에 ‘Oxford(옥스퍼드)’로 바꿨다”고 말했다.

영화 ‘헤어질 결심’ 명대사 ‘마침내’는 극 중 캐릭터 등을 고려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탕웨이(서래)는 옛날 드라마를 보고, 한국말을 잘한다는 얘기를 듣는 캐릭터였다”며 “많이 쓰는 ‘finally’보다 클래식하고 어렵게 느껴지는 ‘at last’를 선택했다”고 밝혔다.

최동훈 감독 영화 ‘타짜’ 포스터. 김혜수 배우가 말한 “나, 이대 나온 여자야”는 달시 파켓이 번역을 어려워한 대사다. CJ ENM 제공 최동훈 감독 영화 ‘타짜’ 포스터. 김혜수 배우가 말한 “나, 이대 나온 여자야”는 달시 파켓이 번역을 어려워한 대사다. CJ ENM 제공

단어 하나도 세심히 신경 쓰는 그가 처음부터 영화 번역을 하려던 건 아니었다. 1997년 한국에 온 파켓 교수는 고려대에서 영어 강사를 했다. 그는 “당시 서울에 있던 영화진흥위원회에서 파트 타임으로 국제팀 일을 도와주다 한국 영화에 관심이 커졌다”며 “한국 영화 정보를 올리는 웹사이트를 운영하다 영국 잡지 <스크린 인터내셔널>에 글을 쓰게 됐다”고 말했다. 영화 ‘미술관 옆 동물원’ 번역을 처음 감수했던 그는 결국 한국인 아내와 ‘살인의 추억’을 공동 번역하며 본격적으로 이 세계에 발을 들였다.

1998년 개봉한 이정향 감독 ‘미술관 옆 동물원’. 달시 파켓이 처음 번역을 감수한 영화다. 시네마서비스 제공 1998년 개봉한 이정향 감독 ‘미술관 옆 동물원’. 달시 파켓이 처음 번역을 감수한 영화다. 시네마서비스 제공

번역이 가장 어려웠던 영화는 ‘국제시장’이었다. 혼자 처음 번역한 작품인데 부산 사투리가 만만치 않았다. 그는 “초반에 ‘아이들’을 뜻하는 사투리 ‘아~들’을 ‘son’으로 착각했다”고 웃었다. 이어 “영어에서 특정 사투리를 선택해 번역하면 관객이 불편하게 느낄 수 있다”며 “사투리 대신 약간 다른 느낌의 영어로 표현하려는데 그게 쉽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배우 조진웅처럼 대사를 빠르게 소화하면 번역이 어렵고, 작품 분위기에 따라 우울함에 빠질 때도 있다”고 했다.

달시 파켓이 번역한 김종관 감독 영화 ‘더 테이블’. 그는 보통 한 작품 번역에 2주 정도 걸리는데 영화 분위기가 감정에도 영향을 미칠 때도 있다고 설명했다. (주)엣나인필름 제공 달시 파켓이 번역한 김종관 감독 영화 ‘더 테이블’. 그는 보통 한 작품 번역에 2주 정도 걸리는데 영화 분위기가 감정에도 영향을 미칠 때도 있다고 설명했다. (주)엣나인필름 제공

사투리 번역은 어려워도 영화도시 부산에 대한 애정과 기대는 크다. 그는 “부산은 이미 아시아를 대표하는 영화 문화 중심 도시”라며 “서울처럼 영화 산업 발전 가능성이 확실히 있는 것 같다”고 밝혔다. 파켓 교수는 부산아시아영화학교 교수를 맡은 공로 등으로 2020년 부산 명예시민이 되기도 했다. 부산에서 인연을 맺은 고 강수연 배우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지난달 런던한국영화제에 참석하기도 했다.

달시 파켓 교수와 자신이 번역한 영화 DVD들. 김종진 기자 kjj1761@ 달시 파켓 교수와 자신이 번역한 영화 DVD들. 김종진 기자 kjj1761@

달시 파켓은 모국인 미국에서 자막 있는 한국 콘텐츠 인기가 높아진 데 자부심을 느낀다. 그는 “예전에는 자막이 있으면 재미없는 예술영화라는 이미지가 있었다”며 “‘기생충’이나 ‘오징어게임’이 잘 되면서 콘텐츠를 통해 문화를 교류할 수 있게 됐다”고 밝혔다. 다만 “봉준호와 박찬욱 다음 세대 감독이 하고 싶은 영화를 만들기는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며 “독특한 재능을 살릴 제작 환경을 만들고 다시 큰 투자도 이뤄져야 한다”며 한국 영화에 대한 조언도 잊지 않았다.


이우영 기자 verdad@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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