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 옹골찬 가야’ 남부 내륙의 중심 정치체 ‘우뚝’ [깨어나는 가야사]
[깨어나는 가야사] 8. 아라가야
남부 가야 제국의 핵심 국가
4~5세기 전반 ‘전성기’ 누려
마산만·진동만, 대외교역 창구
5세기 후반 소가야 부상 ‘위축’
6세기 백제와 신라 압박 심해
활로 모색 불구, 신라에 통합
경남 함안권역의 아라가야는 400년으로 분기되는 전·후기 가야에서 줄곧 큰 세력을 점한 가야 정치체였다. 아라가야는 가야 남부 내륙의 중심 정치체로 ‘작고 옹골찬 가야’였다.
함안분지(함안군 가야읍)에 왕성과 제방, 초·대형 고총고분의 거대 왕묘역(말이산고분군), 왕성과 왕묘역을 조망하는 대형 신전, 2·3중의 배후 산성에 이르기까지 제반 시설을 완벽히 갖춘 가야 정치체였다. 아라가야의 이 집권적 중심을 둘러싸고는 권역 주변에 군사 집단들, 수공업 공인 집단들, 교역 집단들이 지리에 걸맞게 체계적으로 배치됐다. 한 예로 가야읍 북쪽 법수면에 4세기대 전업적 수공업 체제로서 토기가마터 16곳이 집중해서 확인되는데 이 지역이 아라가야의 독보적인 ‘불꽃무늬 토기’를 생산한 곳이었다.
3세기 후엽부터 아라가야는 역사의 전면에 부상했다. 특히 아라가야의 부상에는 가야사의 첫 번째 획기적 역사인 3세기 초의 포상팔국 전쟁이 크게 작용했다는 시각이 우세하다. ‘늑도 교역’의 8개 소국이 1~2차에 걸쳐 ‘김해 교역’의 금관가야와 아라가야를 상대로 전쟁을 벌였다가 참패한 그 전쟁이다. 그리하여 아라가야는 금관가야보다 늦게, 약하게 부상했으나 4세기대 금관가야와 함께 전기 가야의 양대 세력을 형성했다.
그러다가 5세기 전반 아라가야는 최전성기를 구가한다. 400년 고구려 남정에 의해 금관가야가 크게 타격을 입자, 금관가야를 대신해 아라가야가 가야사 전면에 부상한 것이었다. 이때 아라가야가 금관가야 세력 일부를 흡수해 역사 발전을 이뤘다는 주장이 있다.
아라가야 권역이 가장 넓었던 시기는 이미 4세기부터 시작해 최전성기인 5세기 전반에 이르기까지였다. 가야읍을 중심으로 북쪽의 남강 건너편 의령 일부, 서쪽의 군북면 너머 진주 외곽에 이르렀다. 매우 중요한 남쪽의 경우 마산만과 진동만까지 아울렀다.
남쪽의 마산만과 진동만은 아라가야의 대외 교역 창구였다. 남강을 북쪽에 둔 아라가야는 낙동강을 잇는 뱃길도 이용했으나 남쪽 산간(山間) 육로를 통해 마산만과 진동만에 이르렀다. 마산만의 현동유적은 1000여 기의 무덤이 있는 최대급의 가야 고분군과, 특히 제철 유구들과 대규모 취락으로 이뤄진 복합유적이다. 이곳은 아라가야 철기 생산 집단이 있었던 곳이며, 상당수 왜인들도 거주한 일종의 자유무역지대였다. 대형 목곽묘에서는 배 모양 토기와 낙타 모양 토기 등 특수 토기도 출토됐다. 진동만의 경우, 거리상 마산만보다 가야읍에서 더 가까웠다. 이곳 진북 대평리유적에서 5세기 후엽 왜계 고분 등이 확인됐다. ‘현동항’이 무역항이라면 ‘진동항’은 사신이 드나들었던 정치적 성격이 강한 항구로 본다.
아라가야 교역은 광범했다. 4세기~5세기 전반 남해안을 따라 마한·백제와 통했고, 바다 건너 일본열도와 이어졌다. 해상 제국이라는 가야의 진면목을 아라가야가 이 시기에 점차로 실현해 나갔다. 마한·백제와의 교류를 보여주는 흔적으로 아라가야 토기는 여수 광양 장흥 강진 해남, 그리고 천안에서 출토됐다. 일본열도와의 교류에서는 4세기 후반 아라가야는 규슈와 직접 교역했고, 긴키 왜 왕권과는 금관가야를 통해 간접 교역을 확대해 나간다. 5세기 전반 최전성기에 이르러 아라가야는 긴키 지역과 직접 교역에 나선다. 아라가야 토기가 오사카부 교토부 와카야마현에 폭넓게 분포하고, 특히 나라현 북부(카시하라시)에 집중돼 있는 것이 보고돼 있다. 아라가야와 나라현 수장층의 긴밀한 교섭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던 아라가야는 5세기 후반으로 넘어가면서 축소되는 모습을 보인다. 가야 전기에 2개 권역이 있었다면, 가야 후기에는 5개 권역이 형성됐다. 아라가야, 소가야, 대가야, 약화한 금관가야, 비화가야 권역이 그것이다. 5세기 후반 이 5개 권역이 뚜렷해지면서, 즉 가야의 세력 분화로 아라가야는 축소되고 있었다. 특히 소가야의 부상에 의해 아라가야는 위축됐다. 일본열도 왜와의 교역도 현저히 감소했다. 핵심적 대외 창구인 ‘현동항’은 소가야 권역으로 넘어갔다.
아라가야는 후기 5개 권역 중 작은 편에 속했다. 이를 두고 소가야의 부상으로 문화·경제적 관계망이 축소됐으나, 외려 정치권력은 말이산고분군이 있는 함안 가야읍을 중심으로 더 옹골차게 집중·강화됐다고 보기도 한다. 가야읍을 중심으로 한 집약적 집권 체계의 고고학적 표현이 5세기 중·후엽~6세기 초 50여 년간 늠름한 위상을 과시하며 축조되는 말이산고분군의 초·대형 고총고분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소가야가 아니었다. 6세기로 넘어가면서 가야 전체에 대한 백제와 신라의 압박이 심해지고 있었다. 소가야는 백제의 압박, 약화한 금관가야와 비화가야는 신라의 압박으로 힘을 잃어갔다. 6세기에 일본열도와의 교류는 가야에서 백제 주도로 넘어갔다. 일본열도도 고대사가 진전하면서 철을 넘어선 새로운 문물, 종교, 이데올로기가 필요해지면서 백제와의 교류를 넓혀갔다.
가야 판도에서 제대로 남은 것은 남쪽의 아라가야와 북쪽의 대가야였다. 이 두 가야가 백제와 신라에 맞설 수 있느냐 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그러나 아라가야와 대가야는 힘을 합치지 않았다. 아라가야는 역사가 깊었고, 대가야는 권역이 넓었다. 서로 다른 남북의 가야는 힘을 모으지 못했다. 남부 가야 제국(諸國)의 핵심국인 아라가야는 529년 안라회의, 541년과 544년의 1·2차 사비회의를 통해 가야의 활로를 모색하지만 역부족이었다. 아라가야는 561년 이전 신라에 통합됐다.
최학림 선임기자 theos@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