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영의 시인의 서재] 엘리자베스 비숍과 상실의 시학
시인·‘시와사상’ 편집위원
북극에서 내려온 한파 때문에 두꺼운 코트를 입어도 찬 기운이 몸 안으로 스며든다. 곳곳에 장식해 둔 크리스마스트리의 불빛이 따스하다. 추운 날에 마구간에서 태어난 아기 예수를 생각한다. 가난한 산모가 해산할 곳이 없어 마구간에서 아기를 낳았으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늘의 별자리를 보고 찾아온 동방박사의 지혜가 놀랍다. 겨울에 따스한 희망을 전해 주는 아기 예수는 신비롭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그는 스스로 겨울을 선택해 태어난 것이 아닐까.
부유하든 가난하든 소중하지 않은 자식이 없는데, 숭고한 모정을 포기하는 일이 종종 있다. 외롭게 아이를 출산하는 미혼모를 떠올린다. 최근에 아기를 낳은 가정에 실질적인 경제 지원을 하는 정부 정책이 나와 반가웠다. “결혼은 미친 짓”이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청춘의 삶이 팍팍한 현실이다. 정상 가정과 미혼모에게도 사회적 혜택이 똑같이 지원되기를 바란다.
잇단 연말 한파에 몸도 마음도 꽁꽁
상실은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지만
우리 모두가 소중한 우주의 빛이라는
존재의 깨달음으로 승화될 수도 있어
한 해의 끝이 아쉬워 연말에는 모임이 많다. 무사히 한 해를 잘 보냈는지 염려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도 언젠가는 이 지상을 떠날 것이다. 가족이나 연인을 갑작스럽게 잃는 것은 얼마나 고통스러운가. 현대의 자본주의는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소비하도록 유도한다. 자본의 위력을 비판하면서도 삶의 토대를 구축하는 것이 자본이기에 어쩔 수 없이 따르게 된다. 그 누구도 이러한 자본의 구조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소유욕을 추구하되 절제하는 미덕이 필요한 시대이다.
소유를 지향하는 현대 사회에서 미국의 시인인 엘리자베스 비숍(Elizabeth Bishop·1911~1979)은 오히려 ‘상실의 시학’을 전개한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던 슬픔이 그녀의 시인 ‘한 가지 기술(One Art)’에 녹아 있다. 생후 8개월 만에 건축가였던 아버지가 세상을 뜨고 그 영향으로 어머니마저 정신 질환을 앓다가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그때가 그녀의 나이 다섯 살 무렵이었다. 이후로 비숍은 외가와 친가의 조부모 집으로 옮겨 다니며 양육된다. 주체가 형성되는 유아기에 애착 경험이 부족한 비숍은 우울증을 앓기도 하고 알코올에 의존하기도 했다. 그런 그녀가 심리적 안정을 일시적으로 찾았던 것은 브라질에서 건축가 로타 소아레스를 만난 시기였다. 그들의 만남과 사랑의 이야기는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원래 제목은 ‘달에 도달하기(Reaching for the Moon)’였는데, 한국어로 번역된 영화는 ‘엘리자베스 비숍의 연인’이란 제목으로 상영되었다.
브라질에서 로타와 15년 동안 지내는 동안 비숍은 브라질 시인들을 미국에 소개하기도 했다. 그러나 로타와의 사랑도 성격 차이와 갈등으로 끝나고 사업에 실패한 로타는 자살을 한다. 정신 형성에 있어 기본적인 틀이 되는 부모의 사랑이 결핍되고 연인마저 상실한 그녀가 그 참혹한 고독을 극복하는 데 시 창작은 일부분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한 가지 기술’에서는 어머니가 정신병원으로 떠난 이후 한 번도 만나지 못했지만 소중히 간직했던 어머니의 시계를 잃어버린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나는 어머니의 시계를 잃어버렸다. 그리고 보라! 내가 사랑하는/세 채의 집 중 마지막 것이,/아니 마지막에서 두 번째 것도 사라졌다./잃는 기술을 숙달하기가 어렵지 않다.//나는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두 개의 도시를 잃었다. 그리고 더 크게는,/내가 소유했던 어떤 영역, 두 개의 강과 하나의 대륙을 잃었다./나는 그것들이 그립다. 하지만 그것이 재앙은 아니었다.’
이 구절에서 보듯 비숍은 상실에 대한 깊은 통찰을 통해 자존감을 강화시킨다. 인생에서 상실은 피할 수 없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단아한 시 형식으로 토로한다. 이 시는 반복적인 리듬과 적절한 시적 모티브를 활용하여 죽음 혹은 이별로 고통받는 독자를 위로한다.
그리고 나는 비숍이 로타의 머리를 감겨 주면서 쓴 시가 참 인상적이었다. ‘샴푸’라는 시에서 연인의 머리에 난 흰 머리카락을 별똥별로 인지하는 그녀의 따스한 감수성이 돋보인다. 그리고 영화에서 로타가 비숍의 작업실을 만들어 주는 장면은 감동이었다. 알코올 중독 증세가 있는 비숍을 배려하는 로타의 마음과 그것을 시로 승화시킨 그들은 미국 문학사와 브라질 건축사에서 한 획을 긋는다. 예술도 소중하지만 인생의 순간도 숭고한 것임을 비숍은 시에서 재치 있게 전달한다.
살아생전에는 작품 발표를 많이 하지 않았지만, 비숍은 오히려 사후에 ‘엘리자베스 비숍 현상’이라 일컬을 정도로 연구가 활발해졌다. 이 추운 겨울에 연인의 몸을 안아 주거나 다정하게 씻어 주는 추억을 나누면 좋을 것이다. 언젠가 사라지는 존재일지라도 우리 모두는 소중한 우주의 빛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