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 찍었지만 현실 같지 않은… 부산에서 보는 랄프 깁슨의 사진들
랄프 깁슨 사진미술관 ‘블랙 3부작’
고은사진미술관 ‘살롱 리떼레흐’
“모든 예술, 자체로 광원이 되어야”
열린 문, 내려가는 계단, 기둥의 일부…. 현실을 찍었는데 현실이 아닌 것 같다. 꿈에서 보거나 상상에서 본 것 같은 아우라가 보이는 사진. 랄프 깁슨의 사진이 가지는 특별함이다.
초현실주의 거장 랄프 깁슨의 사진 세계를 만날 수 있는 두 개의 전시가 부산에서 열리고 있다. 올 10월 개관한 랄프 깁슨 사진미술관에서 열리는 ‘블랙 3부작(The Black Trilogy)’과 고은사진미술관에서 전시 중인 ‘살롱 리떼레흐(Salon Litteraire)’이다.
랄프 깁슨은 1939년 미국 캘리포니아 할리우드에서 태어났다. 그는 워너브라더스에 근무했던 아버지를 따라 영화 세트장을 방문하며 카메라 렌즈와 빛에 대한 감각을 익혔다. 어린 시절 영향으로 랄프 깁슨은 ‘빛의 원천’에 집중하게 되었으며, ‘모든 예술이 그 자체로 광원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랄프 깁슨은 해군에서 처음 사진을 배웠고, 샌프란시스코 예술대학에서 사진 공부를 했다. 본격적인 사진 경력은 1960년대 초반 도로시아 랭의 어시스턴트로 시작했다. 젊은 시절 매그넘에서 잠시 활동하며 랄프 깁슨은 자신이 “거대한 외부적인 사건들보다는 사진 자체, 사진을 만드는 경험 자체에 관심이 있음을 알게 됐다”고 밝혔다.
흑백 사진 시리즈 ‘블랙 3부작’은 랄프 깁슨이 해군 복무시절 읽은 T.S. 엘리엇의 시집 <네 개의 사중주>에서 영감을 받았다. 랄프 깁슨은 “배에 있는 도서관에서 시집을 발견하고 읽기 시작했는데 이해가 안 됐지만 ‘이런 게 예술이겠구나’라는 감정은 느낄 수 있었다”고 했다. ‘몽유병자’ ‘데자뷰’ ‘바다에서의 날들’ 등 독특한 미감을 선사하는 120여 점의 빈티지 젤라틴 실버 프린트 작품이 전시 중이다.
‘나는 철학적이고 심리적인 함축성을 지닌 사진 즉, 무언가를 유발시키는 사진을 찍는 데 관심이 있다.’ 랄프 깁슨의 시선으로 재구성된 현실은 낯선 감각으로 다가온다. 파라솔과 사람의 손이 보여주는 미묘한 균형감, 열려진 문과 손 그림자에서 느끼는 불안 등 랄프 깁슨의 사진은 현실이 아닌 다른 세계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같다.
‘살롱 리떼레흐’는 랄프 깁슨이 프랑스를 처음 방문한 1971년부터 2022년까지 촬영한 사진들을 소개한다. 프랑스의 문학·문화·철학을 접하며 떠오른 영감을 표현한 작업이다. 특히 이 전시에서는 서로 대응하는 두 장의 사진을 하나의 프레임으로 보여주는 딥틱 방식을 사용해 더 풍성한 이야기를 전달한다.
오래된 건물의 외벽과 낡은 책은 그들이 품은 세월이 보이고, 웨이터 손에 들린 유리잔과 악보 사진에서는 음악이 들리는 것 같다. 벨벳 느낌의 책 표지와 실내 가운을 나란히 배치한 사진은 보는 이의 감각을 촉각으로 이끈다.
83세의 사진계 거장은 자신의 이름을 딴 랄프 깁슨 사진미술관 개관식 때 부산을 찾았다. 현장에서 아마추어 사진가를 위한 조언을 부탁받은 그는 “(대상에) 더 가까이 가라”고 말했다. 실제 그는 자신이 사진을 찍히는 순간에도 “클로즈업, 클로즈업”을 반복했다.
랄프 깁슨의 ‘블랙 3부작’은 랄프 깁슨 사진미술관에서 2023년 3월 31일까지, ‘살롱 리떼레흐’는 고은사진미술관에서 31일까지 열린다. ‘살롱 리떼레흐’ 전시는 고은문화재단이 발행한 동명의 사진집으로도 만날 수 있다.
오금아 기자 chris@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