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 단상] 울산서 본 경찰국 갈등

권승혁 기자 gsh0905@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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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승혁 사회부 동부경남울산본부 차장

2018년 어느 날 한 노년의 남성이 울산경찰청 문을 두드렸다. 그가 수사팀에 내민 서류뭉치는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검찰총장의 처가와 관련한 내용. 수사팀의 얼굴에 순간 복잡미묘한 감정이 스쳐 갔다. 수사팀은 결국 관할권 등을 이유로 수사에 난색을 보였고, 먼 길을 찾아온 노인은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정대택. 당시 윤석열 검찰총장의 장모와 장기간 송사로 얽혀 세간의 입길에 오르내린 인물이었다.

이 일이 있고 수년이 지나 시나브로 흘러나온 이야기를 재구성한 것인데, 윤 대통령 장모가 요양병원에서 수십억 원 세금을 빼먹은 의혹이 최근 면죄부를 받았다는 뉴스를 보다가 언뜻 떠올랐다. 이 사건과 직접적 연관은 없지만, 윤 대통령 장모 이름에 꼬리표처럼 따라붙던 정 씨의 울산행이 아직 여러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그가 낯선 울산 땅까지 어려운 문제를 들고 온 것은 어찌 보면 ‘검경 갈등’의 진원지, 울산이 자석처럼 끌어당긴 우리 사회의 심하게 곪은 환부는 아니었을까 짐작만 한다.

어떤 이는 검경 갈등의 틈바구니에서 견제받지 않는 권력을 상대로 숨구멍을 터 줄 실오라기 같은 기회 하나 엿봤는지 모른다. 하지만 검경 갈등에서 촉발한 복잡다단한 현실은 아이러니하게도 검찰 수장을 최고 권력자의 지위로 단숨에 끌어올리며 정권 심판, 정권 교체를 추동했다. 그 냉혹한 현실의 이면에는 울산에서 발생한 풀리지 않는 굵직한 사건들이 여전히 복병처럼 깔려 있다.

검경 갈등의 부산물이 돌고 돌아 이제 경찰국을 둘러싼 정권의 날 선 반응, 일선 경찰의 반발과 내홍 등에 어른거리는 건 비단 나만 느끼는 기시감은 아닐 테다. 울산에 적을 둔 류삼영 총경은 올해 7월 경찰국 신설에 반대하는 전국 총경 회의를 주도했다가 윤석열 정부의 눈 밖에 났다. 본보기로 찍힌 그는 직책을 박탈당하고 현재 울산청 4층 맨 구석에 명패도 없는 사무실을 빌려 쓴다. 역대 홍보과장이 사용하던 곳인데, 어찌 보면 방 배정을 기막히게 잘한 듯싶다. 공교롭게도 검경 갈등이 최고조이던 시절 윤석열 검찰에서 청와대 하명수사 의혹으로 압수수색한 곳이기도 하다. 그는 현재 정직 3개월 징계를 받고 불복 절차를 밟는 중이다.

반면 경찰국 초대 수장을 맡은 김순호 국장은 과거 노동운동을 하던 동료들을 밀고한 대가로 경찰에 특채됐다는 ‘프락치 의혹’에도 이번 인사철에 경찰 서열 2위로 승진했다. 경찰국을 둘러싼 이들 2명의 엇갈린 운명이 뚜렷한 대비를 이루는데, 이를 보는 시선이 곱지만은 않다.

류 총경의 중징계를 요구한 윤희근 경찰청장은 “역사적 평가까지 염두에 두고 고심 끝에 결론을 내린 것”이라고 했다. 의미심장한 말이나 권력의 눈치를 봤다는 얘긴지, 국민의 눈치를 봤다는 뜻인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것인지 그 의도를 종잡기 어렵다. 행안부 소속 경찰국 출범은 결국 ‘경찰 개혁이냐, 경찰 장악이냐’ 논란만 빚더니 정작 국민 인권과 결부된 깊이 있는 논의는 온데간데없다.

울산에 뿌리를 둔 갈등의 역사를 되짚어보면 과연 더 나은 민주주의로 가는 길이 맞는지 의구심이 생긴다. 정의가 무엇인지 헷갈리는 사회에서 정치가 주는 우울감이 어느 때보다 짙다. ‘역사적 평가’는 평범한 국민이 한다는 사실이 그나마 위안을 주는 정도다.


권승혁 기자 gsh0905@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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