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세기 말~6세기 초 50년간 최전성기 구가한 해상강국 [깨어나는 가야사]

최학림 선임기자 theo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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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소가야

소가야는 남강 수계 세력과 남해안 세력이 결합한 가야 서남부 지역연맹체였다. 사진 아래쪽은 송학동고분군 전경, 위쪽으로 소가야 세력이 해상교역에 나선 남해 바다가 보인다. 가야고분군추진단 제공 소가야는 남강 수계 세력과 남해안 세력이 결합한 가야 서남부 지역연맹체였다. 사진 아래쪽은 송학동고분군 전경, 위쪽으로 소가야 세력이 해상교역에 나선 남해 바다가 보인다. 가야고분군추진단 제공

남강 수계권과 남해안권 결속

가야 서남부 지역연맹체


소가야 핵심세력은

산청 중촌리·고성 송학동 집단


백제와 신라 진출·대가야 남진

560년 전후로 소멸 시기 추정


소가야는 전기 금관가야의 타격 이후 5세기 초부터 6세기 3/4분기(560년께)까지 대략 150여 년간 역사에 등장한 후기 가야 정치체의 하나였다.

그 시기 중 5세기 4/4분기~6세기 1/4분기에 걸치는 50여 년간 최전성기를 구가한 해상강국이었다. 5세기 전반 최전성기를 구가한 아라가야를 뒤이어 소가야는 475~525년 50년간 가야사 전면에 부상해 최전성기를 누렸다. 경남 남해안에 등장한 가야 해상왕국을 시기에 따라 순서대로 보면 4세기 금관가야, 5세기 전반 아라가야, 5세기 후반 소가야였다. 소가야는 백제·마한·가야의 한반도 문물과, 북부 규슈~긴키의 일본열도를 잇는 데 아라가야보다 훨씬 나은 지리적 이점 덕에 해상왕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다.

소가야는 커다란 두 개 세력의 연합에 의해 이뤄진 가야 서남부의 지역연맹체였다. 아주 독특하게 ‘남강수계 세력’과 ‘남해안 세력’의 결합에 의해 구축된 가야 정치체였다. 금관가야 아라가야 대가야 각각의 경우, 결합하는 세력들의 우열이 중심과 주변으로 분명히 구분됐으나 소가야의 경우, 두 세력은 어느 정도 대등했다. 처음에는 남강수계 세력이 먼저 소가야 문화를 형성한 뒤, 해상세력인 남해안 세력과 결합했으나, 나중에는 남해안 세력이 더 오래도록 유지됐다. 남해안 세력의 핵심이 고성의 송학동고분군 집단이다.

첫째 소가야 권역이 남강수계 세력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은 그렇게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소가야의 3대 고분군(고성 송학동고분군, 산청 중촌리고분군, 합천 삼가고분군) 중 2개 고분군이 남강수계에 있다. 남강수계 중 합천 삼가고분군은 330여 기의 고총고분이 조영된 곳으로 2021년 국가 사적으로 지정됐다. 그러나 더 큰 중심 세력 집단을 이뤘던, 수백 기 고분이 밀집한 산청 중촌리고분군은 파괴의 몸살을 앓고서 문화재 지정도 되지 않은 채 방치되고 있다.

남강수계라는 점은 절묘하다. 이를테면 ‘남강 소가야’는 ‘중촌리 소가야’였다. 5세기 이후 중촌리고분군 세력을 정점으로 남강수계의 산청권, 합천 남부권, 진주권이 소가야 권역을 형성했다.

산청 중촌리고분군 일대. 붉은 화살표가 가리키는 곳이 백마산이고, 그 오른쪽 산록에 중촌리고분군이 있다. 경남도 제공 산청 중촌리고분군 일대. 붉은 화살표가 가리키는 곳이 백마산이고, 그 오른쪽 산록에 중촌리고분군이 있다. 경남도 제공

단청권(단성권과 생초권)은 중촌리고분군을 비롯해 모두 40여 곳의 중소형 고분군이 밀집한 곳이다. 합천 남부권은 중촌리에서 거슬러 오르는 남강 지류 양천강 상류지역으로 이곳에 합천 삼가고분군을 중심으로 10여 곳의 중소형 고분군이 있다. 진주권은 중촌리에서 남강을 따라 조금 내려오는 곳으로 60여 곳의 고분군이 산재해 있다. 이들 모든 집단이 중촌리고분군을 정점으로 결집한 것이 남강수계 소가야 세력의 출발이었다. 중촌리 세력은 남강변 해발 286m의 백마산에 백마산성까지 갖추고 있었다.

둘째 남해안 세력은 고성권을 중심으로 사천·통영·거제·하동권을 아우르며, 3세기 초 포상팔국 전쟁으로 타격을 입은 이후 5세기 들어 해상교역의 중심으로 다시 일어섰다. ‘늑도 교역’과 ‘포상팔국’이란 이전의 세력이 권토중래를 통해 몇백 년 후 소가야로 재결집한 셈이다. 고성권은 5세기 후반 가야 대내외 교역의 신생 거점으로 부상했다. 고성권에만 40여 곳의 고분군이 밀집해 있으며 그 정점에 송학동고분군이 있다.

5세기 중반 남강수계와 남해안의 큰 두 세력은 결합하기 시작한다. ‘중촌리 소가야’는 남강 하류를 통해 아라가야의 문화를 받아들였고, 남강 상류의 지류를 통해서는 저 멀리 남원 운봉고원과 이어져 백제·마한 문화를 받아들였다. 5세기 중반까지 남원 운봉고원은 소가야 문화권에 속했다. 이제 ‘중촌리 소가야’는 해상으로 뻗어나가야 했다. 그렇게 만난 것이 남해안 세력이었다. 남강수계 세력은 철과 농산물, 남해안 세력은 소금·해산물과 해상교역이라는 각각의 이점을 통해 결속을 강화했다. 475년께부터 두 세력은 내적 결속을 강화하면서 소가야 최전성기의 강대한 세력을 형성했다. 5세기 후반~6세기 초 순천 여수 광양 고흥 보성 등 전남 동부권에 소가야식 토기가 대량으로 출토되고, 북부규슈와 오사카 등 일본열도에서는 아예 소가야계 공인 집단이 확인된다.

5세기 후엽 고성 소가야 수장층 성장이 두드러져 갔다. 남해안 세력, 특히 고성 지역은 해상교역의 중심으로 굉장히 개방적이었으며, 그 개방성으로 인해 고성 수장층은 더욱 성장한다. 이미 5세기 후반 아라가야 권역이었던 마산만의 ‘현동항’도 소가야 권역으로 편입시켰다. 5세기 중엽 전남 영산강 유역의 마한·백제의 무덤양식인 분구묘가 고성권에 축조된다(1세기를 2등분하는 것이 전반·후반이며, 3등분하는 것이 초엽·중엽·말[후]엽이다). 또 5세기 후엽~6세기 왜계고분도 도입된다. 가야 지역에 왜계석실의 왜계고분 6기 중 3기(거제 장목, 고성 송학동, 사천 선진리)가 소가야 권역에 있다. 고성 소가야 세력은 ‘백제-영산강 마한’과 ‘북부 규슈-긴키 왜 왕권’을 잇는 교역의 중간 거점 역할을 통해 크게 성장했다. 또 남해안에서 남강으로 이어지는 이른바 ‘소가야 루트’를 통해 가야 내륙에 해양 문물을 전하는 관문사회 역할도 했다.

6세기 2/4분기부터 소가야는 쇠퇴기에 접어든다. 백제가 하동까지 밀고들어왔고, 대가야가 남강 수계를 압박해 들어왔고, 신라는 사천만까지 영역을 확장해 들어왔다. 소가야는 백제와 신라의 진출, 대가야의 남진으로 남강수계권과 남해안권이 분열됐다. 고성 소가야가 최후까지 남았으나 끝까지 버티지 못했다. 소가야 소멸 시기는 560년 전후로 추정한다.


최학림 선임기자 theo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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