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호 칼럼] 너의 길을 만들어라

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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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석논설위원

산티아고길 연간 30만 명 완주
제주 올레길과 공동완주제 도입
‘DMZ 평화의 길’ 내년 4월 개통
코리아 둘레길 4500km 눈앞에
해파랑·남파랑길 시작 부산서
백두산·두만강까지 걷기 꿈꿔

해파랑과 남파랑길의 시작은 부산의 오륙도 전망대이다. 부산일보DB 해파랑과 남파랑길의 시작은 부산의 오륙도 전망대이다. 부산일보DB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인 ‘카미노 데 산티아고’(800km)에는 새로운 순례객들의 발자국이 날마다 생긴다고 한다. 연간 30만 명이 완주 증서를 받아 간다니 말 다 했다. 많은 사람들이 1993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록된 이 길을 ‘죽기 전에 꼭 가 봐야 할 곳’으로 꼽는다. 산티아고길 순례자 중에는 브라질 출신의 세계적인 작가 파울로 코엘료도 있었다. 일찍이 코엘료는 작가의 꿈을 포기하고 음반 회사의 지사장으로 잘나갔는데 갑작스러운 해고로 시련을 겪는다. 39세의 코엘료는 1986년에 산티아고 순례 여행을 떠났고 이게 인생에서 극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이 길을 걷고 나서 원래의 꿈을 향해 나아갈 용기를 얻어 대표작인 〈연금술사〉와 〈순례자〉를 발표하면서 작가로 우뚝 서게 되었다.


2007년 천직이라고 여기던 기자 생활을 때려치우고 50세의 나이에 산티아고길을 걸으러 떠난 한국 여성이 있었다. 그런데 막바지 여정에서 만난 영국인 길동무의 한마디가 그녀의 인생을 바꿔 놓았다. “너는 너의 나라로 돌아가서 너의 길을 만들어라. 나는 나의 길을 만들 테니”라는 말은 그녀를 감전시켰다. 고향 제주도로 돌아온 그녀는 올레길을 만드는 일에 발 벗고 나서게 된다.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의 이야기다. 올레길(437㎞)은 제주도 여행의 판 자체를 흔들었다. 유명 관광지에만 몰리던 사람들이 올레길을 따라 제주도의 구석구석을 찾았다. 심지어 제주도에 청년 인구의 유입까지 늘게 만들었으니, 길의 힘이 참으로 대단하다고 하겠다. 올레길의 성공을 목격한 지자체들도 저마다 둘레길을 만들기 시작했다. 열다섯 살이 된 제주 올레길과 1200년 역사를 지닌 산티아고길은 지난 7월 우정의 길 협약을 맺고 공동완주제를 도입했다. 모든 길이 통한다는 말을 실감하게 된다.

상당한 거리감이 있는 스페인과 제주의 길 이야기를 늘어놓은 까닭은 내년에 전 구간이 완성되는 ‘코리아 둘레길’(4500km)의 의미를 부각하고 싶어서다. 그동안 시범 개방되던 ‘DMZ 평화의 길’이 내년 4월 개통된다. 전쟁의 상흔과 분단의 아픔이 서린 비무장지대와 접경 지역을 평화와 공존의 공간으로 전환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한다. 강화, 김포, 고양, 파주, 연천, 철원, 화천, 양구, 인제, 고성 등 11개 코스가 있다.

코리아 둘레길 가운데 해파랑, 남파랑, 서해랑길은 이미 탐방객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2016년 부산 오륙도 해맞이공원에서 강원도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열린 750km의 해파랑길이 가장 먼저였다. 2020년에는 역시 오륙도에서 전남 해남군 땅끝까지 이어지는 1463㎞의 남파랑길이 열렸다. 해남 땅끝에서 인천 강화를 연결하는 1800㎞의 서해랑길은 지난 6월 개통했다. 2010년 문화체육부가 둘레길 조성에 나선 지 13년 만이다. 한국관광공사가 만든 위치정보기반서비스 두루누비 앱을 열면 선택한 코스를 편하게 따라 걸을 수 있다.

한국관광공사는 코리아 둘레길을 산티아고길처럼 만들겠다는 생각이다. 걸어 본 사람들은 단조로운 산티아고길보다 바다가 보이는 해파랑길이 아름답다고 말한다. K컬처가 세계인들의 각광을 받는 모습을 보면 코리아 둘레길도 그렇게 되지 말라는 법도 없다. 해파랑과 남파랑의 시작이 오륙도이니 부산시도 내년 코리아 둘레길의 완성을 2030 부산월드엑스포 유치 활동에 활용해도 좋겠다.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 관광객들이 가장 방문하고 싶어 하는 곳이 DMZ이라고 한다. ‘평화의 길’도 잘 운용하면 세계적인 명소는 물론이고 남북 긴장 완화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남북 관계에 강 대 강 대치가 이어지고 있지만 지나치게 비관할 필요는 없다. 부산에서 베를린까지 가는 가상 열차표 가격이 61만 5000원으로 나와 관심을 끈 게 불과 몇 년 전이다. 손기정 선수는 1936년 부산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만주-시베리아를 거쳐 베를린에 도착해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코리아 둘레길은 이명박-박근혜-문재인-윤석열 정부까지 10년 이상을 이어 완성을 눈앞에 두고 있다.

2023년에 대해선 기대보다 우려가 큰 게 사실이다. 골드만삭스의 수석 이코노미스트를 지낸 짐 오닐은 1997년과 같은 아시아 외환위기를 경고했고, 블룸버그통신은 한국을 특히 취약하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힘들 때일수록 걷기가 필요하다. ‘동지에 일양(一陽)이 시생(始生)’이라는 말이 있다. 밤이 깊고 혹한은 이제부터 시작인 것처럼 보이더라도 눈에 보이지 않는 천지의 기운은 이미 바뀌고 있다는 뜻이다. 나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 볼 작정이다. 압록강-백두산-두만강으로까지 이어지는 진정한 코리아 둘레길이 완성되는 그날을 기다린다.


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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