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정 사진’ 공개하는 흉악범…신상공개 시스템 실효성 논란
택시기사·동거녀 살해 피의자 이기영, 면허증 사진 공개
‘머그샷’ 본인이 거부하면 강제할 수 없어
전주환·조주빈 등 흉악범 유사한 논란 되풀이
택시기사와 동거녀를 살해한 혐의로 구속된 이기영(31)의 사진이 공개됐지만, 실물과 크게 다른 ‘보정 사진’이라 신상공개 시스템의 실효성에 문제를 제기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피의자인 이 씨가 사진 촬영을 거부하자 경찰이 운전면허증 사진을 공개했기 때문이다.
31일 법조계 등에 따르면 신상공개가 결정된 피의자가 동의할 경우 경찰은 체포 직후에 촬영한 사진인 일명 ‘머그샷’(범죄자 인상착의 기록 사진)을 공개할 수 있다. 하지만 당사자 동의가 없으면 신분증 사진을 배포할 수밖에 없다.
이기영 사건을 수사 중인 일산동부경찰서 관계자는 “신상정보공개심의위원회 개최를 앞두고 피의자에게 내용을 고지하면서 사진을 새로 촬영할 의사가 있는지 확인했다”면서 “인권 보호 차원에서 사진 촬영을 강제할 수는 없어 증명사진을 공개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이 씨는 지난 28일 구속 전 피의자심문(영장실질심사)을 위해 법원에 출석하면서 취재진 앞에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으나, 겨울 점퍼에 달린 모자를 푹 눌러쓰고 고개를 숙여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신상정보 공개가 결정된 이후에는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도록 하는 등의 조치가 가능해, 경찰 수사가 마무리돼 검찰로 이송하는 과정에서 이 씨가 포토라인에 섰을 때는 현재의 얼굴이 공개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때도 이 씨 본인이 모자 등으로 얼굴을 가리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이 같은 논란은 올 9월 스토킹하던 20대 여성 동료를 지하철역 화장실에서 살해한 ‘신당역 스토킹 살해 사건’에서도 불거졌다. 살해 혐의로 구속된 전주환(31)의 얼굴이 공개된 후 경찰이 공개한 증명사진과 검찰에 이송될 당시 취재기자들이 촬영한 얼굴이 크게 달랐기 때문이다.
당시에도 시민들은 “포샵한 사진을 공개하면 실물과 크게 달라 신상공개의 의미가 없어지는 것 아니냐”는 반응을 보였다. 신상공개 대상자 가운데 지금까지 머그샷이 공개된 피의자는 지난해 12월 헤어진 여자친구의 가족에게 흉기를 휘두른 이석준(25)뿐이다. 노원 세 모녀 살해 피의자 김태현, 박사방 사건의 주범 조주빈 등 대다수는 머그샷을 공개하지 않았고, 실물과 다르다는 논란을 피해가지 못했다.
피의자의 신상정보 공개제도는 흉악범의 이름과 얼굴 등을 공개함으로써 유사 범행을 예방하고 재범 위험성을 낮추는 등 공공의 이익을 실현하기 위해 도입됐다.
현행 특정강력범죄의 처벌에 관한 특례법에 따르면 범행 수단이 잔인하고 중대한 피해가 발생한 특정강력범죄의 피의자가 그 죄를 범했다고 믿을 만한 충분한 증거가 있을 때 얼굴을 공개할 수 있다. 국민의 알 권리 보장과 피의자의 재범 방지·범죄 예방 등 공공의 이익을 위해 필요한 상황에 해당하며, 피의자가 청소년인 경우는 제외한다.
다만, 무죄 추정의 원칙에 따라 신상정보의 공개는 최소한으로 운용돼야 한다는 것이 경찰청 인권위원회의 권고다. 실제 머그샷이 활발하게 공개되는 미국에서도 인종 차별이나 인권 침해 지적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안준영 기자 jyoung@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