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묘년 토끼해 띠풀이] 토실토실 알밤 같은 소망 싣고 “열려라 새 세상”

최학림 선임기자 theo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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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이 좌우로 활짝 열린 모양의 ‘卯’
동요 ‘산토끼’ 소설 ‘달려라 토끼’ 등
지혜·영적인 것…‘문학적 상징’ 많아
인도 설화에선 ‘자기희생’ 표상 등장

조선시대 12지신상 중 토끼 지신. 국립민속박물관 조선시대 12지신상 중 토끼 지신. 국립민속박물관

‘열려라 토끼!’

2023년 계묘년 토끼띠 새해가 밝았다. 토끼는 12지(支)의 네 번째 동물이다. 방향은 동쪽을 의미한다. 토끼를 뜻하는 한자 ‘묘(卯)’가 묘하다. ‘묘(卯)’는 대문 문짝이 좌우로 활짝 열려 있는 모양새다. 그래서 ‘묘’는 2월과 오전 5~7시를 나타낸다. 만물이 땅을 밀치고 나오는 봄과, 어둠 속에서 문을 활짝 열고 나오는 아침을 상징한다는 거다. 토끼해의 첫날에 ‘열려라 토끼’ 주문을 외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토끼 주문의 첫 이야기는 동요 ‘산토끼’다. ‘산토끼 토끼야 어디를 가느냐 깡충깡충 뛰면서 어디를 가느냐~’. 이 국민동요는 마산 출생의 이일래(1903~1979)가 창녕군 이방초등학교에서 근무하던 1928년 작사 작곡한 거다. “내 평생을 통해서 참으로 음악을 사랑하고 좋아했지요”라 했던 그의 음악 사랑을 느낄 수 있는 곡인데, 이 담백한 노래가 금지곡이 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이 곡에 '부수자 일제 사슬'의 항일정신이 담긴 노랫말을 붙여 많이 불렀기 때문이다. 1975년에서야 동요 ‘산토끼’가 이일래의 창작이라는 게 밝혀졌으며, 1978년 이방초등학교에 노래비가 세워졌다. ‘산토끼’는 우리 근대 동요 역사의 황금시대를 열었던 작품이다.



통일신라 시대의 ‘달과 토끼 수막새’. 중간은 계수나무, 오른쪽은 두꺼비 형상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통일신라 시대의 ‘달과 토끼 수막새’. 중간은 계수나무, 오른쪽은 두꺼비 형상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토끼는 ‘열려라 지혜’의 동물이다. 토끼의 작고 나약한 단점을 극복하는 균형점이 지혜다. 토끼는 한국 동물설화에서 호랑이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이 등장하는 동물이다. ‘토끼의 재판’에서 토끼는 은혜를 모르고 자기를 구해준 사람을 해치려는 호랑이를 스스로 함정에 다시 들어가도록 기지를 발휘하는 동물로 나온다.

아무래도 토끼의 지혜 이야기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건 ‘구토설화’다. 우리나라의 원전은 〈삼국사기〉 ‘김유신’ 조의 김춘추 이야기에 나온다. 고구려에 간 김춘추가 거북이를 속이는 토끼의 지혜에 대한 얘기를 듣고서 기지를 발휘해 살아 돌아온다는 얘기다. 김춘추에게 지혜를 일깨운 ‘구토설화’는 19세기~20세 초 ‘토끼전’ ‘수궁가’로 이어지는데 자그마치 그 판본이 120여 종에 이른다. 이야기 중의 이야기로 계속 회자한 거다. 동물이 등장하는 우화에 민중들이 자신의 처지를 가탁해 새 세상을 꿈꿨던 거다. ‘열려라 새 세상’의 토끼였다.

많은 문사도 ‘마음속 저쪽’을 갈망하면서 ‘열려라 토끼’를 외쳤다. 토끼는 문학적 상징으로 많이 차용됐다. 시인 김수영은 1949년 ‘토끼는 입으로 새끼를 뱉으다’로 시작하는 시 ‘토끼’를 썼다. 해방 이후의 암울한 정치 상황을 직시하려는 의지를 담은 시다. 시인 윤동주는 1941년 ‘바닷가 햇빛 바른 바위 위에/습한 간을 펴서 말리우자’로 시작하는 시 ‘간(肝)’을 발표했다. 시대에 맞서 고통받는 프로메테우스의 의지를 불태우겠다는, 간담을 키우겠다는 다짐의 시다. 소설가 이태준은 1941년 단편 ‘토끼 이야기’를 통해 식민지 강압 속에서 좌절하는 지성의 질곡을 그렸다. 아동문학가 마해송은 1947년 동화 ‘토끼와 원숭이’를 통해 친일·친미·친소련파를 풍자하면서 통일시대를 전망했으며, 아동문학가 이원수는 1963년 동화 ‘토끼 대통령’을 통해 5·16 쿠데타를 비판하는 시대 의식을 문학적으로 환기했다. '열려라 시대' '열려라 민주'의 토끼였다.

미국 작가 존 업다이크는 ‘달려라 토끼’를 외쳤다. 그는 〈달려라, 토끼〉란 소설에 명구절을 남겼다. ‘인생은 계속되어야 해. 우리에게 남은 것을 가지고 계속 나아가야 해.’

과연 우리에게 남은 건 뭘까. ‘열려라 토끼’를 외쳐야 할 듯하다. 토끼는 달빛 신화다. 토끼는 달에 살고 있다. 동요 ‘반달’이 토끼를 달에 데려다 놨다.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엔/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 마리~’.

실상 토끼의 달빛 신화는 오래됐다. 인도 설화에 따르면 굶주려 죽어가는 노인을 위해 토끼가 과감히 소신공양에 나서 불 속으로 뛰어들었는데 실은 그 노인이 천제(天帝)였다. 천제는 보살도를 행하는 토끼를 불에서 꺼내 자기희생의 표상으로 달에 올려보내 영원히 사람들의 가슴에 남아있도록 했다. 달 속 어렴풋한 그림자는 토끼가 불에 탈 때의 연기 흔적이란다.

달 속에 토끼가 있다는 이야기의 기록은 기원전 2세기까지 올라간다. 줄곧 이어져 온 인류의 이야기요, 원형적 전설이다. 토월(兎月) 토백(兎魄)은 달 자체이고, 토영(兎影)은 달 그림자를 뜻한다. 토(兎), 토끼를 아예 달로 여긴 거다. 토끼가 있는 둥근 달은 '열려라 토끼'의 달, '열려라 신화'의 달이다.

21세기 인류는 너무나 똑똑해졌다. 빅뱅으로 만들어진 우주에서 태양계는 1~2차 초신성 폭발을 거쳐 형성된 제3세대 별의 집단이며. 태양에서 가까운 수성 금성 지구 화성은 고체 행성이고, 목성 토성 천왕성은 기체 행성이란 것도 알게 됐다. 밤하늘의 빛나는 별이 아니라 ‘거대한 고체와 기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거다. 또 지구가 생긴 지 1억 년도 안 됐을 때 화성 크기의 소행성이 지구와 충돌해 생긴 잔해가 뭉쳐서 달이 됐다는 거도 알게 됐다. 닐 암스트롱이 그 달에 착륙해 ‘거대한 발자국’을 남긴 지도 50년이 넘었다. 과연 21세기 인류는 인간을 넘어서는 인공지능까지 넘보는 ‘신이 된 인간’으로 나아가고 있다고도 한다.

그런데 과학을 넘어서는 아주 의미심장한 우주의 셈법이 있다. 물리학자 권재술은 우주에서는 ‘1+1=2’로 끝나는 게 아니라고 한다. 그에 따르면 ‘1+1=2+알파’다. 이 알파에서 생명이 나오고 정신이 나온다. 원자와 원자가 만나 종내에는 인간과 정신이 탄생했으니 분명 알파는 더 있다. 이 알파가 우주의 핵심이라는 거다. 우리 마음도 알파이며, 이 막막한 우주의 의미도 알파이고, 궁극적인 신도 알파라는 거다.

우리 할머니와 어머니가 달빛 아래 물 한 그릇을 놓고 소망을 외던 그 비손이 알파다. 인간 마음속의 희망 기대 따뜻함 소망이 알파다. 사랑이 알파다. 그 사랑이 극대화된 것을 신이라고 해도 좋을 테다. ‘열려라 토끼’는 ‘열려라 신화’ ‘열려라 알파’ ‘열려라 사랑’으로 변주되어 간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악령〉에도 토끼가 나온다. “어디 한번 말해봐요. 당신의 그 토끼가 잡혔습니까, 아니면 아직 달아나고 있습니까?” 토끼는 혁명, 신화, 영적인 것, 궁극적인 신을 말한다. 도스토옙스키는 니체처럼 신이 죽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도스토옙스키는 인간에게 신이 필요하다는 것을 더 잘 알고 있었다. 알파를 알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도 ‘열려라 토끼’를 외친 사람의 하나다. 몽상의 시학자 가스통 바슐라르도 마찬가지다. ‘차가운 과학’을 넘어선 ‘따뜻한 상상력과 몽상’을 말했으며, 촛불 신화와 달빛 신화를 썼다.

기실 과학은 신화를 완전히 걷어내기는커녕 경이로움을 더하고 있다고 했다. 막막한 우주를 알면 알수록 우연과 기적의 경이를 마주하는 법이다. 신화학자 조지프 캠벨은 달 탐험을 하고서 외려 인류에게 ‘새로운 영적 시대’가 열렸다고 했다. 지구에서 본 아름다운 달처럼 우주에서 본 지구가 달 이상으로 아름답기 때문이다. 얼마 전 미국 항공우주국(NASA)은 달나라 탐사를 50여 년 만에 재개했다. 우주의 알파, 생명의 신비에 더 다가서기 위해서다. 인간은 이 우주에서 대단한 존재인 것은 분명하지만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르는 존재이기도 하다.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은 모든 것을 알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존재다. 토끼의 달빛 신화가 필요한 것은 그 때문이다.

동요 ‘산토끼’ 2절에서 알밤이 토실토실하다. ‘산고개 고개를 나혼자 넘어서 토실토실 알밤을 주워 올 테야’. 올 한 해, 그리고 장차 우리가, 우리 인간이 주워야 할 토실토실한 알밤은 무엇이어야 할까. ‘열려라 토끼’를 다시 외어본다.

최학림 선임기자 theos@busan.com


최학림 선임기자 theo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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