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희와 함께 읽는 우리 시대 문화풍경] 아포페니아를 넘어
부산대 대학원 예술·문화와 영상매체협동과정 강사
차이콥스키 교향곡 제6번은 그의 마지막 교향곡이다. ‘비창(悲愴)’이라는 부제는 헤어날 수 없는 삶의 비탄과 죽음이라는 숙명을 상징한다. 1893년 10월 28일 초연 후 9일 만에 생을 마감했기 때문에 차이콥스키의 유서이자 삶의 증언이라 해도 좋다. 어둡고 무거운 절망, 슬프고도 나약한 사랑, 깊은 한숨과 모든 것을 체념한 듯한 조용한 발걸음이 갈마든다. 여느 교향곡과 달리 비통한 침묵으로 가라앉으며 끝을 맺는다. 비감의 끝자락에는 삶에 대한 지독한 열망이 깃들어있다. 영국의 음악학자 데이비드 브라운이 이 곡의 본질을 ‘삶’이라 평했던 까닭이다.
지휘자 오충근은 2015년 11월 헝가리 사바리아심포니오케스트라와 무지크페라인 황금홀에서 비창 교향곡을 연주했다. 무려 다섯 차례나 커튼콜을 받았다. 차이콥스키 최고의 걸작으로 꼽는 만큼 세계적으로 인기가 많은 곡이다. 불행하게도 부산에서는 실연을 접할 기회가 적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지금껏 부산시향에서는 이 곡을 연주하지 않았다. 연주할 때마다 교향악단 단원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불운을 겪었기 때문이란다. 지휘자 알렉산더 아니시모프와 리신차오 시절에 선곡을 고심하기도 했지만 마지막 단계에서 제외되었다.
불의의 사고는 과연 이 곡을 연주했기 때문이었을까?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 밤에 휘파람을 불면 뱀이 나온다거나 미역국을 먹으면 시험에 낙방한다는 말처럼 합리적인 근거가 희박하다. 13일의 금요일이나 숫자 4에 부과된 불길함도 마찬가지다. 심리학에서는 인과관계가 부족한 일이나 현상을 연결하여 의미나 연관성을 찾아내려는 인지 현상을 아포페니아(Apophenia)라 한다.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합리적인 판단을 할 수 없거나 그럴 필요가 없는 상황에서 모든 정보를 종합하려는 인지적 부담을 줄일 수 있다. 인과관계가 불명확할 때 상황을 통제하거나 나쁜 결과를 받아들이고 극복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새해에 들면 신수를 보곤 한다. 한 해를 시작하면서 다복과 행운을 바라며 마음을 다잡는 의미가 크다. 삼가고 거듭 살펴서 나쁠 것도 없다. 고대로부터 과학기술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미신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이성과 합리성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세상사의 갖은 굴곡을 견디는 방편이기 때문이다. 미신도 때로 위로가 된다. 미국에서는 매년 첫 번째 13일의 금요일이 ‘남 탓으로 돌리는 날’이란다. 공연한 공포를 웃음으로 승화하는 지혜다. ‘비창’으로 번역한 6번 교향곡의 부제도 오해라면 오해다. 러시아어 파테티체스카야(Патетическая)는 비애나 깊은 슬픔보다는 차라리 파토스에 가깝다. 불안과 비애, 우울과 절망에서 촉발된 우리 삶의 모든 아포페니아를 넘어 열정적으로 삶의 진경(眞景)으로 나아가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