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복도로 외갓집의 특별한 변신…‘경일메이커스’ 이야기
오유경 작가, 부산 수정동 새 공간
‘삼대 가족사’ 품은 낡은 집 개조
아버지 운영 ‘경일미싱’ 이름 따와
외할머니와 아버지의 삶이 담긴 산복도로 낡은 집이 손녀이자 딸인 작가에 의해 예술공간으로 변신했다. 지난해 말 부산 동구 수정동 969-100번지(동구 홍곡중로 40)에 문을 연 ‘경일메이커스’. 이곳은 설치작가 오유경에게 특별한 공간이다.
경일메이커스 입구 접이식 철문 위에 달린 작은 문패를 통해 ‘경일미싱’에서 유래한 곳임을 알 수 있다. 오 작가는 “미싱 공장을 하던 아버지가 창고로 쓰시던 곳이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사시던 집이었다”고 말했다. 철도 공무원이었던 외할아버지가 부산역 발령을 받고 이 집을 구입했다. “제 아버지와 어머니가 결혼하고 잠시 사셨던 적도 있다고 해요. 이후 여기 위쪽 수정아파트에 살았는데, 부모님이 일을 하셔서 저는 거의 외갓집에 있었죠.”
외할머니-아버지-오 작가 이어주는 공간
어린 시절 보낸 옛집, 산복도로 매력 전해
19일까지 ‘맺고 있는 얽힘 상태’ 전시 열려
“예술가 베이스캠프 같은 곳 되기를 바라”
초등학생이 될 무렵 오 작가의 아버지는 양정에 작은 재봉틀 공장을 차렸다. ‘경일미싱’의 ‘경일’은 외할머니의 함자에서 따왔다. “할머니가 정말 좋은 분이라 아버지와도 관계가 돈독했어요. 제가 공사하는 것을 보고 이 집에 사셨다는 분이 할머니 안부를 묻기도 했어요.”
경일메이커스의 탄생은 오 작가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신 것이 계기가 됐다. “2년 전 아버지가 강서구 대저동에 새로 미싱 공장을 임차해 한쪽에 제 작업실을 준다고 하셨어요. 그런데 이사 다음 날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옛 외갓집 창고까지 정리하게 됐죠.”
오 작가에게 수정동과 외갓집은 추억의 장소였다. 행복했던 기억과 골목이 가진 넘치는 매력에 이끌려 언젠가 여기는 자신이 쓰겠다고 늘 생각했다. 그는 창고 짐을 빼낸 뒤 집수리를 시작했다.
비가 새는 곳부터 화장실 개조까지 약 2년에 걸쳐 작품 판매 등 작가로 일하며 번 돈을 거의 다 사용해서 공간을 완성했다. 전시장 겸 작업장으로 사용할 새 공간의 이름은 공업용 재봉틀 기술자였던 아버지를 생각해 ‘경일메이커스’라 지었다.
“미싱은 부속이 엄청 많아요. 기계마다 다 달라서 수만 가지 부속 중에서 딱 맞는 것을 찾아내야 하죠.” 오 작가는 재료를 쌓고 조립하고 연결하는 자신의 설치 작업이 ‘부품을 조립해서 새 부품을 만들고 기계를 돌리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고 했다.
지난해 오 작가는 프랑스 에르메스 공방 아티스트 레지던시 10주년 기념 전시를 비롯해 서울 아모레퍼시픽미술관의 현대미술 작가 지원 프로젝트 ‘에이피 맵 리뷰’전 등에 참여했다. 경일메이커스 개관전 ‘맺고 있는 얽힘 상태’는 이전 작품의 남은 조각들을 새로 조립해서 만든 신작을 전시한다.
아버지가 사용하던 바이스를 재료로 한 작품을 만들 때, 오 작가는 “작업을 도와주는 손이 하나 더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외할머니는 북에서 피란을 오신 분인데, 이산가족 상봉 방송이 나오면 지금 전시장이 있는 위치에서 TV를 보며 울곤 하셨죠.” 오 작가의 대표 시리즈 작업인 ‘바람의 탑’의 크리스털 부분에 ‘외할머니-아버지-딸’ 오 작가 삼대의 삶을 이어준 산복도로 풍경이 비쳤다.
“21살 때 안나푸르나에 갔는데, 같이 모여 밥을 먹고 정보를 나누는 베이스캠프의 존재가 참 크게 와닿았어요. 경일메이커스가 그런 기능을 하는 곳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오 작가는 경일메이커스를 통해 최근 동구 좌천동에 미술공간 ‘제2작업실’을 오픈한 방정아 작가도 만났다고 했다(부산일보 12월 23일 자 15면 보도).
“미술은 계속 소통하면서 같이 발전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오유경 작가의 전시 ‘맺고 있는 얽힘 상태’는 19일까지 관람이 가능하다. 관람 예약은 오 작가 이메일(oroogang@gmail.com)로 연락하면 된다.
오금아 기자 chris@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