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 단상] 국민의 의무 다하기
김백상 사회부 차장
연말정산 결과 덜 낸 세금이 발견돼 다음 달 월급이 줄어들 운명이라면, 혹은 우편함에서 주정차 위반 과태료 부과 통지서가 발견된다면, 문득 국가의 존재 이유를 고민해 볼 수 있다. 20여 년 전 입대 뒤 첫날 밤에 그런 고민을 아주 깊게 했다. 대한민국이 나에게 해 준 게 뭐가 있다고, 우리 돈과 시간을 마음대로 가져간다는 말인가.
대다수 인간은 받은 것에 고마워하기보다 뺏길 것에 화를 내기 마련이다. 게다가 세금으로 돈이 나가는 것은 명확하게 보이지만, 나라가 하는 일 대부분은 숫자로 환산하기 힘들어 눈에 보이지 않는다. 코로나19 재난지원금으로 뜻밖의 현금이 생긴 경우처럼, 피부에 와 닿는 국가의 업무 결과는 드물다. 그래서 “세금을 이렇게 걷어가면서, 나라는 뭘 하고 있고 왜 있냐”는 푸념은 언제나 주변인의 지지를 받기 쉽다.
그럼에도 국민 다수는 내라는 세금을 제때 내는 성실한 이들이다. 국가 시스템 해체를 꿈꾸는 아나키스트를 평생 직접 만나본 적도 없다. 가끔 또는 습관적으로 국가의 불필요성에 대해 열변을 늘어놓지만, 실은 대다수 국민도 국가가 멈추면 공동체가 무너지고 개인의 삶도 없다는 걸 알고 있다.
국가가 없다고 생각해 보라. 국공립 학교는 당연히 사라진다. 사립학교나 대학교도 국가가 만들어준 교육 시스템이 있어 존재할 수 있으니, 지식을 체계적으로 배울 곳이 없다. 국가와 지자체가 도시를 설계하고 집 앞에 도로를 놓아준 덕에 차도 몰고 버스도 탈 수 있다. 국가 차원의 농업을 보호하고 농산물 관리 시스템을 마련했기에, 밥상에 쌀이 오를 수 있다. 소방서와 경찰서가 없으면 불안해서 잠을 못 잘 것 같다. 따지고 보면 일상 모든 것들이 국가가 쌓아온 인프라 위에서 벌어지고 있고, 국가가 잘 돌아가야 우리 삶의 질이 올라 간다.
민주화된 세상에선 국민의 의무 수행과 국가의 역할 수행 중 어느 하나가 우선될 수 없다. 우리가 국민의 의무를 하듯, 국가도 충실히 나랏일을 수행할 의무가 있는 셈이다. 우리가 세금을 내고 대한민국 시스템에 순응하는 것은, 국가가 자기 일을 잘해줄 거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나랏일은 다양하지만, 첫 번째로 ‘국민 보호’가 꼽힌다. 우리의 생명을 지켜주는 게 가장 기초적인 업무인 셈이다. 물론 국가가 모든 사고와 위협을 막을 수는 없지만, 노력해야 한다. 교통사고는 기본적으로 운전자의 과실이 있겠지만, 사고 다발 지역에 속도 제한을 하고 때로는 도로 구조도 바꾸는 건 국가의 업무다. 그렇게 국가는 최소한의 안전이 보장되는 공동체를 만들 의무가 있다. 사회 전반의 안전 수준이 올라가 후진국형 참사를 예방할 수 있을 때, 흔히 말하는 선진국이 될 수 있다.
좁은 골목에서 159명이 숨진 이태원 참사 관련 특수본 수사가 마무리됐다. 사고가 있던 지난해 10월 29일 밤 대한민국은 아직 길에서 깔려 죽을 수 있는 수준의 나라라는 게 입증됐다. 구체적인 인과관계를 떠나 대한민국은 이런 허망한 사고를 예방하는 일에 실패했다. 현 정부, 전 정부의 잘못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실패다. 그럼에도 국가 차원의 진정한 반성이 있었는지, 국가가 제 역할을 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이런 불신이 해소돼, 기쁜 마음으로 대한민국 국민의 의무를 수행하고 싶다.
김백상 기자 k103@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