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한우가 먹고 싶을 뿐!
조선 임금 연산군은 소고기라면 사족을 못 썼다. 날마다 소 10마리를 잡아 요리로 올리게 했다. 대단한 미식가라 소의 태(胎)를 유달리 좋아했다.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이야기다. 사대부들의 소고기 애착도 엄청났다. 중종의 외척 김계우는 한 달에 잡아먹은 소가 6마리였다고 한다. 광해군 때 실학자 이수광은 “(선조 때 판중추부사를 지낸) 원혼이 93세까지 살아 신선이라 불렸는데 평생 소고기를 즐겼기 때문”이라며 소고기를 예찬했다.
고개를 갸웃하는 이가 많을 테다. 조선은 소고기 먹는 것을 국법으로 엄격히 제한했던 것이다. 소는 제사에 올렸던 신성한 희생이면서 동시에 농사에 없어서는 안 될 동물이었다. 한 해 농사를 망치는 원인으로 한재(旱災)보다 소 마릿수 감소를 더 위험하게 여겼을 정도였다. 우금령(牛禁令)이 그래서 나왔다. 지금으로 치면 소 도축 금지령인데, 고려시대부터 간헐적으로 내려졌다. 조선시대엔, 평균으로 치면 거의 20년에 한 번 꼴로 내려졌는데, 태형에서 파직, 유배까지 형벌이 다양했다.
하지만 유명무실했다. 우금령에도 “소가 다쳐서 일을 못해 잡을 수밖에 없다”는 식의 핑계로 소 탐식을 그치지 않았던 것이다. 혹 적발되더라도 돈으로 때우는 경우가 많았다. 숙종이 그런 세태를 한탄하며 한 말이 있다. “우역(牛疫)으로 살아 남은 소가 없다. 그런데도 소고기 맛을 으뜸으로 쳐서 먹지 않으면 못 살 것처럼 여기니 어찌해야 좋은가.”
그렇게 보면 수년 전 한 역사저술가의 “조선시대 1인당 소고기 섭취량이 현대 한국인보다 많았다”는 주장이 엉뚱하게만은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사대부 같은 지배층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하층민이라고 그 감미(甘味)를 왜 몰랐겠냐만 하루살이조차 겨운 그들에게 소고기는 언감생심이었을 테니까.
근래 사육 농민의 근심이 크다. 산지 한우 가격이 폭락했기 때문이다. 지난해에 비해 30% 이상 떨어졌다고 한다. 희한하게도, 산지 한우 가격은 폭락했는데 시장이나 음식점에서의 한우 고깃값은 이전과 별반 차이가 없다. 유통 과정의 문제라고는 하는데, 여하튼 조선의 ‘소’가 그랬던 것처럼 지금의 ‘한우’(그 유전자가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는 여전히 서민이 가벼운 마음으로 접할 수 있는 식재료가 아니다. 없는 이도 한우가 먹고 싶은 건 가진 자와 매일반인데, 솟값과 고깃값이 따로 노는 이런 모순이 새삼 얄궂고 야속하다.
임광명 논설위원 kmyim@busan.com